메뉴 건너뛰기

주요인물2

주요인물2

전주류씨 현관(顯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을 근거로 한 전주류씨 현관(顯官) 중에서 종2품 참판급 이상 선조님은 다음과 같으며,  누락된 선조님을 참고문헌[족보 제외]과 함께 알려주시면 보완하겠습니다. 

 

 1. 정1품(正一品)
      조선시대에 정1품은 정승(政丞)으로서 의정부(議政府)의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을 말한다. 이와 동급인 관직으로는 영사(領事), 도제조(都提調), 세자시강원 사부(師傅)가 있으며, 전주류씨 영흥공 후손은 영의정(領議政) 1명이 있다.

 

   (1) 9세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1550∼1608
       자(字)는 선여(善餘), 호(號)는 춘호(春湖), 참봉 의 아들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등을 거쳐 임진왜란 때는 초유어사, 황해도순찰사,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를 하고, 정유재란 때 지중추부사, 병조참판을 하고 대사헌으로 있을 때 류희분 등과 함께 남이공의 당이 되어 소북의 영수가 되었다.
  그 후 이조판서, 우의정에 오르고, 전양부원군에 봉해진 뒤 호성공신2등에, 영의정(領議政)을 할 때 선무원종공신1등에 녹권 되었다. 선조 말년 선조 임금의 뜻에 따라 광해군 대신에 영창대군을 세자(世子)로 옹립하려 하였는데 선조 임금이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 이이첨과 정인홍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削奪官職
: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던 일)되어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으며, 인조반정으로 모든 관작이 복구되었다.

 

 2.  종1품(從一品)
     품계 종1품 관직으로는 판사(判事), 찬성(贊成) 등이 있으며, 전주류씨 영흥공파는 판사(判事) 1명이 있다. 

 

     (1) 15세 판돈령부사 류복명(柳復明) 1685∼1760
          자(字)는 양휘(陽輝), 호(號)는 만촌(晩村)이며, 도사(都事) 류성(柳宬)의 아들이다.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세자시강원 보덕(輔德), 형조참의, 호조참판, 도승지, 경기감사, 병조참판, 대사헌, 도승지,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형조판서 등을 하고 70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3. 정2품(正二品)
    품계 정2품관은 판서(判書)로서 중앙행정관서 육조(六曹)의 장관을 말한다. 여기서 육조(六曹)는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이며, 판서(判書)와 동급인 관직은 지사(知事), 참찬(參贊), 판윤(判尹), 도총관(都摠管), 대제학(大提學), 영목사(領牧使) 등이 있다.
  육조(六曹)의 판서는 의정부 참찬(參贊), 한성부 판윤(判尹),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과 함께 정경(正卿)이라 하였으며, 전주류씨 영흥공 후손은 판서(判書) 2명과 판서와 동급인 도총관(都摠管) 2명이 있다.


  (1) 8세 형조판서 류  훈(柳  塤) 1524~1587
      자(字) 극화(克和), 호(號) 청계(淸溪), 부친은 전첨(典籤) 류세구(柳世龜)이다. 명종 때 생원(生員)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 정언, 정랑, 선천군수, 경상병사, 전라감사 등을 하고 형조판서(刑曹判書)를 하였다.

 

  (2) 16세 공조판서 류  당(柳  戇) 1723∼1794
      자(字)는 직보(直甫), 호(號) 천수제(踐修齊), 부친은 수찬(修撰) 류겸명(柳謙明)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 지평, 부수찬, 동부승지·안동부사·병조참의를 거쳐 대사성·이조참의·형조참판·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안변부사, 동지중추부사,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3) 16세 병조판서 류 혁(柳 爀) 1710∼1781

     자는 휘숙(輝叔), 시호는 정간(靖簡), 양부는 증판서 류망지(柳望之), 양모(養母)는 좌랑 이조원(李肇源)의 따님 광주이씨이며, 영조12(1736)년에 정시무과에 급제하였다.

영조14(1738)년 부사정이 된 후 훈련원 부정에 이어서 철산부사, 훈련원 정(正)이 되었다. 영조30(1754)년에 대구영장, 우림위장, 겸내금위장, 도총관 등을 하고 영조36(1760)년 충장위장을 거쳐 겸사복장, 길주목사를 거쳐 영조41(1765)년 전라우수사, 영조44(1768)년 경상좌병사에 이어서 용천부사, 경상좌병사, 강계부사가 되었다. 영조51(1775)년에는 제주목사를 할 때 표리(表裏)를 상으로 받았다.

정조즉위(1776)년에 전라병사, 본영기사별장을 하고 본영천총을 할 때 신병(身病)으로 체직된 후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정조5(1781)년 5월 14일 별세하니 정조5(1781)년에 정간(靖簡)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정2품 판서급(判書級) 도총관(都摠管)·지사(知事)

 

  (3) 11세 도총관 류정량(柳廷亮) 1591∼1663
      자(字)는 자룡(子龍), 호(號)는 소한당(素閒堂). 부친은 현감 류열(柳悅)이며, 선조37(1604)년 14세 때 선조의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혼인하여 전창위(全昌尉)에 봉해졌다. 광해4(1612)년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의 모함으로 일가가 몰락될 때 전라도 고부(古阜)에 유배되었는데 다시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작위가 회복되어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오르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성록대부(成祿大夫)에 이르러 세훈(世勳)을 물려받고 전창군(全昌君)에 봉해졌다.
  인조24(1646)년, 효종2(1651)년 및 효종6(1655)년에 각각 사은사(謝恩使)·진향사(進香使)·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글씨에 뛰어났고, 호성원종공신1등, 선무원종공신1등, 청난원종공신1등에 녹권 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4) 19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창근(柳昌根) 1790~1863
      자(字)는 평도(平道) 부친은 엄(曮)이며, 순조13(1813)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겸(武兼)에 이어 부사과, 훈련주부, 선전관, 도총도사ㆍ경력, 맹산현감, 철산부사, 전라좌수사, 충청병사를 하였고, 철종1(1850)년 부사로서 가자(加資)되었다.
  철종11(1860)년 평안병마절도사를 한 후 철종13(1862)년 도총관(都摠管)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하였고, 사후(死後) 순종4(1910)년 7월 24일 일등훈(一等勳) 팔괘장(八卦章)을 하사받았다.

 

 4. 종2품(從二品)
     종2품 참판은 조선시대 의정부(議政府)에 소속된 6조(六曹)의 판서(判書) 다음의 관직(官職)이다.
  참판과 같은 종2품 관직으로는 동지사(同知事), 대사헌(大司憲), 좌우윤(左右尹), 유수(留守), 부총관(副摠管), 임진왜란(壬辰倭亂)전의 위장(衛將), 상선(尙膳), 제학(提學), 감사(監司), 부윤(府尹), 판목사(判牧使), 중군대장(中軍大將),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마방어사(兵馬防禦使), 수군방어사(水軍防禦使),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겸사복장(兼司僕將) 등이 있다.
  종2품관의 경우에 육조(六曹) 중에서 여러 조(曹)의 참판을 하신 경우는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순위로 관직명을 나타내었다. 전주류씨 영흥공 후손은 참판이 14명이며, 참판과 같은 종2품 관리는 18명이 있다.

 

종2품 참판(參判)

 

   (1) 4세 이조참판 류의손(柳義孫) 1398~1450
       자(字)는 효숙(孝叔), 호(號)는 회헌(檜軒)/농암(聾巖), 부친은 부사 류빈(柳濱)이며, 세종 때 생원 및 진사가 된 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감찰, 수찬을 역임하였다.
  응교를 할 때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곧바로 직제학이 되었고, 동부승지, 도승지,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참판에 기용되었는데 부친상을 당하여 몸이 쇠약해져 끝내는 병으로 사직하고 전주로 낙향하여 황방산에 소와정을 짓고 유유자적하였다.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순조 때 안동의 기양서당과 전주의 용고서원(용강서원)에 배향되었다.

 

   (2) 5세 이조참판 류계반(柳季潘)  ? ~ ?

      족보(族譜)에는 이조참판으로 되어 있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홈페이지 한국역대인물종함정보시스템에 게재된 관직과 조선왕실록에는 이조참의가 제일 높은 관직이다.  호(號)는 문암(文巖), 부친은 집의 류말손(柳末孫)이며,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 성균관사성, 이조참의에 제수되었으며, 감찰을 할 때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3) 7세 대사헌 예조참판 류윤덕(柳潤德) ? ~ ?
      자(字)는 선숙(善叔), 호(號)는 남천(南川), 부친은 부사 류식(柳軾)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 형조좌랑, 예문관헌납, 사헌부장령, 우통례, 대사간, 병조참지,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이어 승정원도승지, 황해감사를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을 하고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전라감사(全羅監司)를 하였다.

 

   (4) 7세 이조참판 류세린(柳世麟) 1490~ ?
       자(字)는 사인(士仁), 호(號)는 활탄(活灘)/팔우당(八友堂), 부친은 대사간 류헌(柳軒)이며,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 사헌부지평, 사헌부장령, 세자시강원필선, 부제학, 승지,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5) 9세 예조참판 류영길(柳永吉) 1538~1601
      자(字)는 덕순(德純), 호(號)는 월봉(月篷). 부친은 참봉 의(儀)이다. 명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부수찬, 정언, 병조좌랑, 전적, 헌납, 평안도도사, 강원도관찰사, 승문원제조를 지내고 선조26(1593))년 임진왜란 때 겸도총관(兼都摠管)에 이어서 한성부우윤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연안부사, 병조참판, 경기도관찰사를 한 후 예조참판으로 치사하였다. 호성원종공신2등, 선무원종공신1등에 녹훈되었고, 시문(詩文)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월봉시집이 있다.

 

   (6) 9세 호조참판 류영순(柳永詢) 1552~1632

       조선왕조실록과 북천공[류영순] 은퇴 후 아산(牙山)에 있는 별장(別莊)에 계실 때 북천공의 부탁으로 조익 선생이 쓴 양졸암기(養拙庵記)에는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하였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편도 호조참판으로 되어 있어 본고에서도 호조참판으로 한 것이다.
      자(字)는 순지(詢之), 호(號)는 졸암(拙庵)/북천(北川), 부친은 부사 류연(柳埏)이다. 선조 때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성, 장령, 집의, 동부승지, 우승지, 황해도관찰사, 병조참지, 성주목사, 좌승지, 정평부사, 경상도관찰사, 호조참판, 광해군 때 순천부사,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학관을 할 때 광국원종공신 1등, 행부사를 할 때 선무원종공신1등에 녹훈되었다. 

 

   (7) 9세 병조참판 류영립(柳永立) 1537~1599
       자(字)는 입지(立之). 호(號)는 사송헌(四松軒), 부친은 사인 감(堪)이며, 선조 때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인, 지평, 영변판관, 보성군수, 철산군수, 공주목사, 종성부사, 승지, 개성유수, , 함경도관찰사, 병조참판을 하였다.

 

   (8) 11세 병조참판 류경창(柳慶昌) 1593 ~ 1662
      자(字)는 선백(善伯)이고, 호(號)는 성탄(聲灘)/미천(薇川)이다. 광해군 때 생원,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정자, 정언, 수찬, 교리, 지평, 헌납 , 이조정랑, 암행어사, 집의, 사간, 승지, 강원도관찰사, 강계부사, 영중추부사, 대사간, 형조참의, 병조참판, 대사간, 동지사 부사, 대사헌을 하였으며,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9) 12세 예조참판  류  심(柳  淰) 1608~1667
       자(字)는 징보(澄甫), 호(號)는 도계(道溪). 부친은 전창군 류정량(柳廷亮)이다. 인조 때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을 하여 음직으로 참봉, 세자익위사 시직(侍直)을 할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638년 사은진주 겸 성절동지사(謝恩陳奏兼聖節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효종2(1651)년 경상감사로 나아가 이듬해에 전주류씨 최초 족보인 임진보를 창간하였고, 효종7(1656)년에 평안감사를 역임하였다.
  현종즉위(1659)년 예조참판으로 고부 겸 주청사(告訃兼奏請使)의 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강화유수가 되었으며, 현종3(1662)년에는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직강(直講)을 할 때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였다

 

   (10) 12세 예조참판  류  경(柳  炅) 1626 ~ 1692
      자(字)는 중회(重晦), 호(號)는 여은(犁隱), 부친은 동부승지 류준창(柳俊昌)이다. 효종6(1655)년 춘당대시(春塘臺試)에 장원급제하여 전적, 감찰, 병조좌랑, 예조좌랑 등을 지낸 후 부안현감, 상주목사, 영해군수, 정언, 종성부사, 한성부 우윤·좌윤을 지내고, 형조·예조·공조 참판을 거쳐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숙종16(1689)년 안동부사로 부임하였는데 모함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1) 16세 예조참판 류  강(柳  焵) 1736~1798
      자(字)는 사정(士精) 부친은 류윤지(柳潤之)이다. 영조42(1766)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기사관, 전적, 예조정랑, 정언, 부교리, 병조참지, 동부승지, 우부승지, 대사간, 광주부윤, 우승지, 병조참의, 조사오위장, 우윤,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형조참판, 대사간, 여주목사, 충청감사, 호조참판, 예조참판, 경주부윤, 도승지, 동지의금부사를 하였다.

 

   (12) 16세 병조참판 류  숙(柳  숙 ) 1763∼?
      자(字)는 여신(汝信), 부친은 관명(觀明)이다. 영조39(1763)년에 태어나 정조7(1783)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하였다. 족보(族譜)에는 참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순조14(1814)년 6월 13일에 병조참판을 한 기록이 있으며, 족보에는 3대(代)가 추증(追贈)된 기록이 있다.

 

   (13) 17세 예조참판 류의양(柳義養) 1718 ~ 1786
      자(字)는 계방(季方)/자장(子章), 호(號)는 후송(後松)이다. 영조32 (1756)년 생원이 되어 음직으로 현감을 지낸 뒤,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사서, 수찬, 교리를 역임하고, 집의, 영남어사에 이어 강릉부사, 성천부사를 지내고 예조참의로서 춘관지(春官志)와 영희전지(永禧殿誌)를 편찬하였다.
  정조7(1783)년 예조참판으로 감동관이 되어 덕릉과 정릉을 개축하고 이어 승지가 되어 증보문헌비고의 수찬(修撰)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공조참판으로서 춘방지(春坊志)를 저술하고, 다시 정조11(1787)년 부총관으로서 오례의(五禮儀)를 보집하였고 정조12(1788)년 춘관통고(春官通考)를 저술하였다.

 

   (14) 17세 호조참판 류정양(柳鼎養) 1767∼1833
       자(字)는 석로(錫老), 호(號)는 긍수제(肯修齊), 부친은 판서 당(戇)이다. 생원으로서 순조9(1809)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직장, 수찬, 정언, 태천현감, 수찬, 집의, 우통례, 응교, 사간, 동부승지, 예조참의, 영변부사 등을 역임하고, 순조13(1813)년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홍경래의 난 때 일을 잘못한 죄로 지평 조영걸(趙永傑) 등의 탄핵을 받아 장흥부에 유배되었는데 그 뒤 석방되어 형조참의, 오위장,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부총관 등을 하였다.

 

   (15) 18세 병조참판 류  의(柳  誼)  ? ~ ?
      자(字)는 의지(誼之), 호(號)는 추강(秋忼), 부친은 좌부승지 류선양(柳善養)이며, 영조45 (1769)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을 거쳐 강원·관서의 암행어사,  대사간, 병조참판을 거쳐 승지, 홍주목사를 역임하고 대사헌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평소 신중한 언행과 검소한 생활을 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6) 18세 병조참판 류치명(柳致明) 1777∼1861
      자(字)는 성백(誠伯), 호(號)는 정재(定齋). 부친은 진사 회문(晦文)이며, 순조5(1805)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 전적, 정언, 지평, 문학 등을 거쳐 전라도사(全羅都事)가 되었고, 교리, 우부승지, 초산부사,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철종4(1853)년 가선계(嘉善階)에 오르고 한성좌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나 나가지 않았다.
  1857년 제자들이 지어준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이듬해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정재문집(定齋文集) 등이 있다.

 

종2품 참판급(參判級)

 

  (1) 5세 위장(衛將) 류계장(柳季漳) 1435~1515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류계장 선조님은 종2품 위장(衛將)을 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위장은 정3품으로 되었다. 
      부친은 집의(執義) 류말손(柳末孫)이다. 세조6(1460)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권지, 남해현감, 도총부경력, 훈련원부정,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중종3(1508)년에 위장(衛將)을 하였다.

 

  (2) 6세 동지성균관사 류숭조(柳崇祖) 1452~1512
     자(字)는 종효(宗孝), 호(號)는 진일재(眞一齋). 서령 류지성(柳之盛)의 아들이다. 진사로서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 정언, 부교리, 장령을 하였고 연산군 때 직간(直諫)하다가 미움을 사서 원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판결사, 공조참의, 성균관대사성, 동지성균관사가 되어 성리학의 학통을 새롭게 하였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좌찬성에 가증되었다.
  18년 동안의 벼슬길을 거의 성균관에서 보내면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유림을 다수 배출시켰으며, 자신이 혼천의를 만들었고, 공(公)이 남긴 칠서언해는 언해의 효시로 후학들에게 큰 공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진일재문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전주 용강서원과 봉화 송천서원에 배향되었다.

 

  (3) 9세 수군통제사 류지신(柳止信) 1559~ ?
     자(字)는 입부(立夫), 생부(生父)는 증판서 참(參), 양부(養父)는 증판서 영(泳)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영암군수, 태천현감을 하고, 부령부사일 때 호성원종공신 1등에, 또한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권 되었었고 전라좌수사, 경상우병사, 통제사 등을 하였다.

 

  (4) 9세 부총관 류조생(柳肇生) 1564~
      자(字)는 응시(應時), 부친은 완안군 효찬(孝纘)이며, 선조24(1591)년 음직(蔭職)으로 내금위(內禁衛)를 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고성군수, 평안도우후, 영암군수를 거쳐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에 이르렀으며, 호성공신3등, 선무원종공신1등, 청난원종공신1등에 녹훈되고 완원군(完原君)에 봉해졌다.

 

  (5) 10세 경상좌병사 류응형(柳應泂)
      부친은 통제사 지신(止信), 모친은 청주김씨이며, 생몰년대는 미상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숙천부사, 용강현령을 하였고, 인조1(1623)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인조2(1624)년에 경기수사를 하였다.
  인조4(1626)년에 체직(遞職)되었는데 그 해에 가선대부 행 용양위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그 후 성천 부사(成川府使), 경상좌병사(左兵史), 경기수사(京畿水使)를 하였고, 동지중추부사를 할 때 정사원종공신3등에 녹권(錄券)되었다.

 

  (6) 10세 전라감사 류  색(柳  穡) 1561∼1621
      자(字)는 자유(子有), 호(號)는 사호(沙湖). 부친은 감사 영립(永立)이며, 선조15(1582)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음직으로 의금부도사를 할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별좌, 부정자, 형조좌랑, 정언, 호조좌랑, 영변판관, 배천군수를 하였다.
  그 뒤 양주목사, 예빈시부정, 선천군수, 승문원판교, 강계부사가 되었고, 호조참의, 우승지, 장단부사, 1619년 전라감사를 할 때 전주 감영(監營)에서 별세하였는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호성원종공신3등에 녹권 되었다.

 

  (7) 10세 강원감사 류  항(柳  恒) 1574∼1647
     자(字)는 여상(汝常), 호(號)는 구봉(九峯), 부친은 참판 영길(永吉)이며, 선조34(1601)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직으로 판관을 할 때 1606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정언을 지낸 뒤, 광해4(1612)년 춘호상공[류영경]에게 추형(追刑)이 가하여질 때 그의 일파였다는 죄로 삼수에 안치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장령에 등용되어 단천군수, 양양부사를 거쳐 강원감사에 올랐다가 이듬해 치사(致仕)하였다. 시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구봉집이 있다.

 

  (8) 11세 전라병사 류  정(柳  檉) 1610∼?
     자(字)는 택지(澤之), 부친은 도정(都正) 응시(應時), 모친은 진주인 동지(同知) 강추(姜樞)의 따님이다. 인조13(1635)년 무과에 급제하여 내승(內乘), 경주판관을 하고, 효종2(1651)년 거제 현령(縣令), 효종5(1654)년 황해병사를 거쳐 충주영장이 되었고, 효종8(1657)년 가자(加資)되었으며, 이어서 여산영장이 되었다.
  현종즉위(1659)년 안흥첨사, 현종3(1662)년 훈련도정, 이듬해에 경원부사를 거쳐 현종7(1666)년 정평부사에 이어서 전라병사가 되다.

 

  (9) 11세 경주부윤 류  지(柳  榰) 1626∼1701
     자(字)는 중오(重吾), 호(號)는 괴애(乖厓). 부친은 증참판 희잠(希潛)이며, 인조24(1646)년 사마시, 효종5(1654)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기사관, 지평, 장령, 정언, 상의원정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결성, 단성 등지의 현감, 밀양부사, 능주목사, 길주목사, 조사위장, 만포첨사 경주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죽자 숙종은 제문을 내려 치제하였으며, 저서로는 괴애집이 있다.

 

  (10) 11세 부총관 류시성(柳時成) 1613~ ?
      자(字)는 무숙(茂叔), 부친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완릉군 파(坡)이다. 인조14(1636)년 음직(蔭職)으로 충의위(忠義衛)를 할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부장을 하고 외직으로 신천군수, 무장현감을 하였으며, 효종 때는 위원군수(渭原郡守)를 하였다.
  현종 때는 좌변포도종사관, 부사과, 도총경력을 하고 진도군수, 훈련부정, 삼화현령, 삭주부사, 훈련원 정, 삼척영장, 병조가참지를 거쳐 첨지중추부사, 창성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으며, 완창군(完昌君)에 봉해졌다.

 

  (11) 12세 길주방어사 류문수(柳文燧) 1651~1722
      자(字)는 장원(章遠), 부친은 수동지(壽同知) 류익(柳杙)이며 효종2(1651)년 6월 1일 태어나 숙종2(1676)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숙종8(1682)년 영등만호(永登萬戶)에 이어서 토산현감(兔山縣監), 선적첨사(善積僉使), 보성군수(寶城郡守),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을 하였다.
  숙종29(1703)년에 나주영장(羅州營將)을 거쳐 충주영장(忠州營將), 내금위장(內禁衛將), 명천부사(明川府使), 철산부사(鐵山府使)를 하였다.
  숙종40(1741)년에 안흥첨사(安興僉使)를 거쳐 영종첨사(永宗僉使), 겸오위장(兼五衛將), 산산첨사(蒜山僉使)가 되었으며,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
족보(族譜)와 류병문(柳炳文)이 지은 8세 류성(柳城)의 묘갈명(墓碣銘)에 따라 종2품 이상의 현관(顯官)에 수록한 것이다.]를 한 후 경종2(1722)년 10월 9일 별세하였다.

 

  (12) 13세 경주부윤 류이복(柳以復) 1653~1738
     자(字)는 군휴(君休), 호(號)는 오류(五柳), 부친은 참판 류심(柳淰)이며, 효종4(1653)년 태어나 숙종5(1679)년 진사(進士), 숙종15(168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정언(正言), 지평(持平), 평안도사(平安都事)가 되었다.
  숙종19(1693)년 병조정랑(兵曹正郎)에 이어 문학(文學), 이조정랑(吏曹正郎), 평양판관(平壤判官)이 되고, 숙종22(1696)년에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이어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었다. 숙종26(1700)년 강원감사(江原監司)에 이어서 나주목사(羅州牧使), 경주부윤(慶州府尹)을 한 후 영조14(1738)년 별세하였다.

 

  (13) 15세 동지중추부사 류휘지(柳徽之) 1693~1777
     자(字)는 미경(美卿), 부친은 현감 언(遃)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영조5(1729)년 부장, 훈련주부, 훈련판관, 영원군수, 선전관, 훈련부정, 경주영장, 명천부사, 우림위장, 첨지중추부사, 구성부사, 풍천부사, 온성부사, 여주목사, 평산부사, 우림위장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품계(品階)는 영조51(1775)년 부사직(副司直)을 할 때 숭정대부(종1품 하)에 이어 영조52(1776)년 부호군(副護軍)을 할 때 숭록대부(종1품 상)에 가자(加資)되었다. 

 

  (14) 16세 전라병사 류  혁(柳  爀) 1710~1781
      자(字)는 휘숙(輝叔), 생부(生父)는 원지(元之). 양부(養父)는 망지(望之)이며. 숙종36(1710)년 3월 11일에 태어나 무과(武科)로 영조14 (1738)년 선전관이 된 후 훈련원 주부(主簿), 도총부 도사(都事), 훈련원 정(正), 대구 영장(英將), 우림위장, 부산첨사, 첨지, 충장위장 등을 거쳐 길주목사가 되었다.
  영조42(1766)년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에 이어서 영조49(1773)년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하였고, 영조51(1775)년 제주 목사를 할 때 표리(表裏)를 상으로 받았으며, 정조즉위(1776)년에 전라 병마절도사를 한 후 정조5(1781)년 5월 14일 별세하였다

 

  (15) 19세 경주부윤 류승근(柳承根) 1813~ ?
    자(字)는 치간(致幹, 穉幹), 생부(生父)는 류경(柳警), 양부(養父)는 류화(柳訸)이며, 헌종1(1835)년에 생원이 되어 음직(陰職)으로 공릉참봉을 하고, 이어서 빙고별제를 거쳐 광흥창 봉사, 직장, 주부를 하였다.
  철종5(1854)년 회덕현감으로 나가서는 흡곡현령, 통천군수, 맹산현감을 거쳐 수원부 판관을 하였다.
  고종8(1871)년 사도시 첨정, 광흥창수, 장악원 및 사재시의 첨정, 호조정랑이 되었고, 고종19(1882)년 돈령부 도정이 되었다.
  고종21(1884)년에는 조사위장 겸 첨지중추부사가 된 후 고종24 (1887)년에 경주부윤이 되어 생가(生家)의 조부 류민양(柳民養)은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조부 류연(柳埏)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고종25(1888)년에는 공조참의(工曹參議)를 하였다.

 

  (16) 20세 동지훈련원사 류  찬(柳  瓚) 1807~1891
       자(字)는 화서(和瑞), 부친은 성근(成根)이며, 고종7(1870)년 교동부사에 이어 경상병사가 되었고, 고종23(1886)년 동지훈련원사가 되었으며, 고종25(1888)년 행 호군(護軍)일 때 다섯 아들이 무과에 급제하여 법전에 따라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上)에 가자(加資)되었다.

 

  (17) 20세 상선 류재현(柳載賢) 1847~1884
       호(號)는 소국(小菊)이며, 부친은 류필근(柳弼根)이다. 4세 때 개[犬]에게 물려 고자(鼓子)가 되자 서울 고자촌에 입적(入籍)하여 양반의 후예로서 내시부(內侍府) 환관(宦官)이 되어 갑신정변[1884] 때 상선(尙膳)으로 고종 임금을 지키다가 김옥균(金玉均) 일당에게 피살당하였다.
     고종38(1901)년에 육군 법원장 백성기(白性基)의 주청에 따라 장례원에서 관장하는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었고 그 후 증시(贈諡) 논의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선(尙膳) : 조선시대 문관에 속하는 내시부의 종2품 환관직이며, 정원은 2명이다. 1명은 궁중에서 수라간을 지휘하여 임금·비빈(妃嬪)·대비(大妃)·왕세자의 식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고, 1명은 판내시부사로 내시부의 관원 전체를 감독·통솔하는 내시부의  수장이었다.

 

   (18) 21세 탁지부 차관 류정수(柳正秀) 1857~1938
       호(號)는 뇌원(雷園), 부친은 완(琓)이며, 철종8(1857)년 4월 10일 태어났다. 고종18(1881)년에 유길준(俞吉濬)과 함께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의 경응의숙에서 공부를 한 후 귀국하였다.
  고종19(1882)년 거효렴대책(擧孝廉對策)에 합격하고, 고종20(1883)년 전환국 사사(司事)를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다시 전환국사사(司事)가 되었고 같은 해 8월에 제대강(製代講)에 합격하였다.

  고종31(1894)년 한성 부윤(府尹)을 거쳐 탁지부 참서관, 회계국장, 사계국장, 중추원의관(議官), 양지아문 기사원(記事員), 탁지부 사계국장, 고종40(1903)년 중앙은행 창설위원하였고, 고종41(1904)년 탁지부 협판(協辦)이 되어 부친, 조부 및 증조부가 법전(法典)에 따라 추증(追贈)되었다.
  고종43(1906)년 1월 31일 탁지부(度支部) 협판(協辦)을 할 때 훈3등(勳三等) 팔괘장(八卦章)을 하사받았고, 순종1(1908)년 12월에 탁지부 차관(次官)으로 훈2등 팔괘장(八卦章)을 하사받았으며, 순종2(1908)년에 회계검사국(會計檢査局) 차장(次長)을 하였다.
  한일강제병합 후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中樞院)의 찬의(贊議)와  참의(參議)를 하였고, 1938년 경학원(經學院) 대제학(大提學)과 명륜학원(明倫學院) 총재를 겸직하였으며, 같은 해 3월 17일 별세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때의 친일활동으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