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 및 묘지

9세 증참판 묵계공[류복립] 묘비
贈參判柳公復立墓碣銘
公諱復立字君瑞號墨溪全州之柳肇自完山伯諱濕三傳而至諱義孫參判集賢殿提學號笑臥堂取季氏執義諱末孫第三子贈承旨諱季潼爲後寔公之高祖也曾祖諱軾典翰祖諱潤德副提學副學之弟司儀諱潤善生贈僕正諱城娶聞韶金氏贈判書璡女生公于嘉靖戊午七月二十一日十一歲入承大宗後爲副學公之胤參奉諱墀之子自嬉戲時手持桑蓬曰此大丈夫禦敵之具也幼失怙恃其始受孝經也至雖欲孝誰爲之句輒泫然曰是正道如我人也及讀忠可移於君又欣然曰余得之矣聞者莫不驚異之稍長受業於內舅金鶴峯誠一勤鍊篤志以忠義自期戊子以抄選授宗簿主簿辭不就及龍蛇之亂鶴峯以招諭南下公奮曰我世臣義當死國以妻子托伯氏杖劒從之鶴峯喜甚俾贊籌畫其泗川固城等收復之功公力爲多朝廷進鶴峯職右觀察入守晉城未幾病且歿以城守托公公與倡義使金公千鎰復讐將高公從厚等矢心同力枝梧者六十餘日城竟陷與諸公同日死之寔癸巳六月二十九日也亂己命立祠于晉祀死事諸公而公則以無官守不得與焉只命復其戶晉之人立石以哀之其後百二十有七年肅廟己亥大宗伯閔公鎭厚以公議白上贈吏參越十一年英廟己酉命旌閭陶菴李先生文以記之又其後七十有四年今上壬戌命配享于晉之彰烈祠於是乎其危忠大節愈久而愈顯國家崇報之典亦可謂無餘憾矣嗚呼士或不幸而遇難輒自處以在野之臣初無可死之義紛紛然草間苟活者聞公之風尙庶幾知愧也夫前夫人全州李氏司直永宗女先公十六年丁丑歿葬于高陽圓塘洞甲坐原及公殉節以遺衣冠祔于右有一男昊贈參判後夫人全州李氏縣監福胤女無育昊生五子栝梲檝杙樀並尊遺志廢擧業曾玄以下百餘人並繁不錄銘曰有矗其石晉江之側忠臣之血千古不泐有菀松楸先墓孔邇魂兮歸來於此於彼
族後孫 左承旨 鼎養 撰
증참판 류공 복립 묘갈명
공의 이름은 복립이고 자(字)는 군서이며 호(號)는 묵계로서 전주류씨이다. 완산백(完山伯) 습(濕)으로부터 시작하여 4세에 이르러 의손은 참판으로 집현전 제학을 하였는데 소와당이라 부른다. 막내 동생 집의 말손의 셋째 아들 증도승지 계동을 양자로 맞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식(軾)은 전한을 하였고 조부 윤덕(潤德)은 부제학을 하였다. 부제학의 동생 통례원 인의 윤선은 증사복시정 성(成)을 낳았고 성(城)은 문소김씨인 증판서 김진의 따님을 맞이하여 공(公)을 명종13(1558)년에 낳았는데 11세 때 대종손 부제학공의 아들 참봉 지(墀)의 양자가 되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소꿉 장난을 할 때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쥐고 이르기를 “이것이 대장부가 적을 방어하는데 쓸 연장이다”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효경을 배우기 시작하였을 때 “아무리 효도를 하고자 하여도 누구에게 하는가”라 하고 문득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나는 정도(正道)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책을 읽고는 “임금에게의 충성으로 바꾸리라”하고 또 기꺼이 이르기를 “나는 성취하리라”하니 듣는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자라가면서 수업은 외삼촌 학봉 김성일에게 배웠으며 부지런히 숙련하고 충의를 스스로 목표로 하였다.
선조21(1588)년에 발탁 되여 종부시 주부에 제수 되였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학봉공이 초유사(招諭使)로 남쪽으로 내려가니 공은 분개하며 말하기를 “내가 대대로 이어온 충신인데 국가를 위하여 의롭게 죽는 것이 당연하다”하고 처자를 형님 댁에 의탁하고 큰칼을 차고 따라가니 학봉공이 매우 기뻐하였다. 계책을 세우고 도와서 사천, 고성을 수복하였는데 공의 공적(功績)이 많았다.
조정으로부터 학봉공이 승진하여 경상도 우관찰사로 진주성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병환으로 별세하실 때 진주성을 지킬 것을 공에게 부탁하니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등과 맹세하고 협력하여 지키기를 60여일에 진주성은 결국 함몰 당하고 말았다. 여러 분과 같은 날에 순절(殉節)하니 이 날이 선조26(1593)년 6월 29일이다.
왜란이 끝났을 때 진주에 사당을 세워 죽은 이들을 모두 제사 지내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공은 벼슬이 없이 참전(參戰)하였기 때문에 같이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단지 집에 세금과 부역면제의 특전이 내려지고 진주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이를 슬퍼하였을 뿐이다.
그 후 127년만인 숙종45(1719)년에 예조판서 민진후 공께서 공(류복립)에 대한 여론을 임금께 여쭈어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11년이 지난 영조5(1729)년에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는 도암 이재 선생이 글을 지었다.
그리고 그 후 74년이 지난 순조2(1802)년에 진주 창렬사에 추향 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니 옳은 일이며, 그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더욱 오래도록 나타날 것이니 나라에서 베푼 포상이 어느 법도에도 유감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다.
아! 선비로서 불행한 난을 만나 자신이 처해 있는 곳이 재야의 신하로서 처음에는 의롭게 죽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하였으리라. 민간으로서 생활하는 자들이 공의 풍격을 듣고 가까이 아는 이로서는 더욱 부끄러워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초취 부인 전주이씨는 사직 이영종의 따님인데 공보다 16년 앞서 선조10(1577)년에 별세하셨다. 묘소는 고양시 원당동(도내동) 서남향 산기슭에 있는데 순절하신 공의 유품인 의관을 우측에 부장(附葬)하였으며 외아들을 두었다. 공의 후취 부인 전주이씨는 현감 이복윤의 따님인데 자손이 없다. 외아들 호(昊)는 5남을 두었는데 괄(栝), 절(梲), 집(檝), 익(杙), 적(樀)이다. 모두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모시고 남이 버린 집에서 생업을 하시었다. 증현손 이하는 100여명으로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 없다.
새겨(銘) 이르기를 “촉석루가 진강 옆에 있고 충신의 피가 영구히 부서지지 않을 소나무가 우거진 동산에 있다. 조상의 묘에 아주 가까이 혼이 돌아오니 이것이 그대인가”라고 하였다. 족후손 좌승지 류정양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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