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자료
이천 율면 일문삼효정려(一門三孝旌閭)
1. 직제학공파 호암지 제3호[2007년] 게재문
정려선조(旌閭先祖)
13세 류시준(柳時俊)ㆍ16세 류승휴(柳升休)ㆍ17세 류우문(柳禹文) 利川
회헌공(檜軒公, 柳義孫)의 9대손 대이공[大而公, 류시준(柳時俊)]과 그의 증손(曾孫) 원빈공[源斌公, 류승휴(柳升休)] 및 원빈공의 아들 낙여공[洛汝公, 류우문(柳禹文)]의 효행(孝行)을 표한 일문삼효정문(一門三孝旌門)을 모신 정려각이 경기도 이천시 율면 월포리 도월부락(挑越部落) 입구에 있다.
이 정려각은 1942년에 후손 류철호(柳哲鎬)가 건립하였는데 훼손되자 1995년에 옆자리에 옮겨 건립(建立)하였다. 대이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농사일과 공부에 열중(熱中)하고 부모님을 극진히 봉양(奉養)하 였다. 아버님이 종기가 나서 의원(醫院)에게 물으니 입으로 고름을 빨아 내면 나을 것이라 하니 즉시 입으로 빨아내 뿌리가 뽑혀 완치되었다.
또한 겨울에 해삼(海蔘)이 먹고 싶다고 하니 구할 수 없어 근심이 태산 같은데 꿈속에 노인이 나타나 내일 동쪽으로 10리쯤 가면 해삼을 얻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꿈에 일러준 대로 동쪽으로 십리쯤 가니 초상(初喪)이 나서 분상(墳上)을 하고 평토제(平土祭)를 모시는데 제물(祭物)에 해삼이 있어 상주(喪主)에게 해삼을 구한다는 사연을 말했더니 상주는 기꺼이
해삼을 주어 아버님께 드시게 하여 병환(病患)이 씻은 듯이 나으니 온 동리 사람들이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송(稱頌)이 자자하였다.
대이공(류시준)의 증손(曾孫) 원빈공(류승휴)는 도학자로서 예(禮), 시(詩), 경문(經文)에 통달(通達)하였으며, 항상 부모님의 곁에서 정성스럽게 음식과 평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 행동거지(行動擧止)를 군자와 같이 지켜 보통사람과는 특이했다.
모든 사람에게 충효를 근본으로 삼으라고 훈교하고, 집안에서는 가례규범(家禮規範)을 엄격히 하여 이 고을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경모하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원빈공류승휴)의 둘째아들 낙여공(류우문)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님이 난치병(難治病)으로 오래 눕게 되자 약을 구하러 충북 보은군 속리산에 들어 갔는데 날이 저물어 절에 머물고자 승방(僧房)에 들어가 스님에게 아버님의 병세를 이야기하고 명약(名藥)을 구한다는 말을 하니 홀연히 노인이 나타나 환약(丸藥) 열 개를 던져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약을 아버님이 드시니 병이 깨끗이 나았다. 또한 어머님이 노환으로 몸이 쇠약하여 병이 자주 나자 대변을 맛보면서 정성으로 간병을 하였으나 차도가 없자 손가락을 잘라 생혈(生血)을 내어 어머님 입에 넣어드리니 회생(回生)하시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이와 같이 대이공(류시준), 원빈공(류승휴), 낙여공(류우문) 3대를 내려 온 특이한 효행이 세상에 알려지자 삼대효자정려(三代孝子旌閭)를 상신하게 되었다. 이 당시 고종 임금이 어가를 타고 음죽현을 지날 때 생원 박건배(朴建培) 등 여러 선비들이 어전에 꿇어앉아 대이공(류시준)의 지극한 정성(精誠)으로 하늘을 감동시킨 효행을 표창(表彰)해 달라“는 상소를 하니 고종28(1891)년 5월 13일 일문삼효정려(一門三孝旌閭)가 내려진 것이다.
2. 율면농협 홈페이지 게재문
월포리 일문삼효정문(月浦里 一門三孝旌門)
소재지 : 율면 월포리 도월부락(栗面 月浦里 都月部落)
유시준(柳時俊)과 그의 증손(曾孫) 승휴(升休)와 그의 아들인 우문(禹文)등 유씨일문(柳氏一門)의 효행(孝行)을 표한 정문(旌門)이며 도월부락(挑越部落) 동구에 있다. 1942년에 후손 유철호(柳哲鎬)가 건립한 정려각(旌閭閣)이 훼손되자 1995년 다시 옆자리로 옮겨 건립(建立) 하였다.
임금께서 예조(禮曹)에 내린 효행에 대한 기록을 보니 그 내용인즉 지난달 28일 고종께서 어가를 타시고 음죽현(陰竹縣)을 지날때 경기도 진사(進士) 박건배(朴建培)등 여러 선비들이 어전에 꿇어앉아 이미 조정(朝廷)에 효자 포상을 품위 상신한 바와 같이 유시준의 지극한 정성(精誠)으로 하늘을 감동시킨 효행을 정효려를 세워 표창(表彰) 하라는 상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음죽에 거주한 유시준은 세종조 명신(名臣) 이조판서 유의손(柳義孫)의 9대손이며 어려서부터 천성지효(天性至孝)로서 십세부터 농사일을 하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공부에도 열중(熱中)하고 부모님을 극진히 봉양(奉養) 하였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배꼽아래에 큰 종기가 나서 의원(醫院)에게 물으니 좋은 약은 없고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면 나을 것이라 하니 그 날로부터 입으로 빨아내시니 뿌리가 뽑혀 완치되었고 또 해삼(海蔘)을 먹고 싶다고 하시니 한겨울에 해삼을 구할 수 없어 근심이 태산 같은데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내일 동쪽으로 10리쯤가면 해삼을 얻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꿈이 하도 이상하여 꿈에 일러준대로 동쪽으로 십리쯤 가시니 초상(初喪)이나서 분상(墳上)을 이루고 평토제(平土祭)를 모시는데 제물(祭物)에 과자와 해삼이 있어 염치불구하고 상주(喪主)에게 인사(人事)하고 해삼을 구한다는 사연을 말했더니 상주는 기꺼히 허락하고 철상(撤床)하면서 해삼을 주어 급히 가지고 와서 아버님께 드시게 하였다. 이에 해삼을 자시고 병환(病患)이 씻은듯이 나으시니 온 동리 사람들이 하늘이낸 효자라고 칭송(稱頌)이 자자 하였다.
또한 어머니 윤씨가 알지못하는 중병(重病)으로 오래도록 누워 고생을 하시는데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라 들리는 말에 먼곳에 진씨성(陳氏姓)을 가진 의원이 있는데 명의(名醫)라 하므로 노자를 마련하여 의원을 찾아 백리나되는 먼 길을 가는데 길가에 한쌍의 꿩이 있는데 가까이가도 도망을 가지않아 꿩을 품에 안고 의원을 찾으니 의원이 깜짝놀라며 반겨하는 말이 내 아들이 병이나서 고생하는데 꿩이 약(藥)이라고 하나 이를 구하던 중이라며 어머님의 병상(病狀)에 따라 듣고 약을 후하게 지어 주는바, 이 약을 어머님께 달여 드리니 신묘하게 병이 완치되었다.
유시준의 증손(曾孫) 승휴(升休)는 도학자로 예, 시, 경 문(禮. 時. 經文)에 통달(通達)하여 7세에 소학(小學) 효경(孝經)을 배워 그 이치를 터득 하고 항상 부모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으로 차린 따뜻한 음식과 평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헛된 말을 아니 하여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 행동거지(行動擧止)를 군자와 같이 엄숙하게 지키셨으니 뜻이 높고 굳세어 보통사람과 달리 특이했다.
무려 20여년간 제례(祭禮) 행사가 끊어지지 않았으니 예기와 효경에 있는대로 제례를 엄숙하게 봉전(奉典)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충효를 사람됨의 근본으로 삼으라고 훈교하고, 집안에서는 가례규범(家禮規範)을 엄격히 하여 이 고을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경모하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승휴(升休)의 차자(次子) 우문(禹文)은 어려서부터 영특출중(英特 出衆)하셨으며 효심과 효행이 지극하시어 부모님보다 먼저 식사를 드시지 아니하셨고 아버님께서 난치병(難治病)으로 오래도록 누우시게 되자 약을 구하려 충북 보은군 속리산에 들어 가셨는데 날이 저물어 절에서 머물까 하여 승방(僧房)에 들어가 스님에게 아버님의 병세를 이야기하고 명약(名藥)을 구한다는 말씀을 하시니 홀연히 나타나 환약(丸藥) 열개를 던져주므로 어떻게 먹는 약인지 를 물어 보아도 대답을 하지않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으니 신기한 일이다.
그 노인은 산신(山神)인가하며 그 약은 신약(神藥)으로 신효(神效)를 보셨으며 또한 어머님께서 노환으로 몸이 쇠약하시어 병이 자주 나시니 가사일체와 간병(看病)을 몸소 하시고 병자(病者)의 대변을 맛 보면서 정성으로 간병을 하셨으나 차도가 없자 손가락을 잘라 생혈(生血)을 내어 어머님 입에 넣어드리니 회생(回生)하시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이와같이 유시준(柳時俊), 유승휴(柳升休), 유우문(柳禹文)은 삼대를 이어 내려온 특이한 효행은 세상에 드믄 일이니 효행을 상신하여 삼대효자정려(三代孝子旌閭)를 세워 효행의 뿌리로 삼고자 합니다. 국법(國法)에 예조(禮曹)는 이와같은 업무를 결재할 수 없으니 나랏님께서 재가해 주십시오하니 광서(光緖) 17년 5월 13일 동부승지(東部承旨) 정세원(鄭世源)이 예조에게 상신한 효행을 보고 고종(高宗) 임금에게 상신(上申)하여 특시하라는 윤허(允許)를 받았다.
3. 계남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양경직 제공자료
전주류씨 삼대정효각(三代旌孝閣)
경기도 이천시 율면 월포1리 923-8번지 소재 삼대정효각(三代旌孝閣)은 1942년 류우문의 손자 류철호(柳哲鎬, 1887-1956)가 건립하였다. 그후 정려각이 풍우(風雨)에 훼손되자 1995년 3월 19일에 옆자리로 이건(移建)하였다. 상량문에는 1995년 1월 23일 기둥을 세우고 상량했다고 쓰여 있다.
경기도 이천시 율면 월포1리 속칭 도달미(都月里)에 있는 전주류씨 별제공파(別提公派) 삼대정효각(三代旌孝閣)은 류시준(柳時俊,1732-1790)·류승휴(柳升休, 1802-1867) · 류우문(柳禹文, 1830-1916) 3대의 효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이다.
삼대정효려비(三代旌孝閭碑) 앞면은 아래와 같다.
三代旌孝閭之閭
天感孝子 全州柳時俊 贈朝奉大夫童蒙敎官臣吏曹判書柳義孫九代孫贈朝奉大夫童蒙敎官
天感孝子 全州柳升休 柳時俊 曾孫 贈朝奉大夫童蒙敎官
天感孝子 全州柳禹文 柳升休 贈朝奉大夫童蒙敎官
銘旌 高宗王二十八年五月十三日(辛卯西紀一八九一年) 國費特施築造允許裁可
○하늘이 감동한 효자 류시준. 세종조 명신(名臣) 이조판서 류의손(柳義孫)의 9대손으 로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하늘이 감동한 효자 류승휴는 류시준의 증손으로,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하늘이 감동한 효자 류우문은 류승휴의 차남으로,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고종(高宗) 28년 5월 13일(신묘, 서기 1891년) 정려(旌閭)를 내릴 것을 명하고, 국비를 특별히 내려 축조하는 것을 허가하여 재가하였다.
당초(當初)에 정려문 현판의 글은 아래와 같다.
孝子 學生 贈朝奉大夫 童蒙敎官 柳時俊之閭
孝子 學生 贈朝奉大夫 童蒙敎官 柳升休之門 當宁 辛卯五月日 命旌
孝子 學生 贈朝奉大夫 童蒙敎官 柳禹文之門 當宁 辛卯五月日 命旌
1995년 후손들이 다시 만든 상기(上記)의 정려문과 하기(下記)의 당초 정려문을 보면 차이가 많이 난다. 무엇보다도 효자학생(孝子學生)을 하늘이 감동한 효자(天感孝子)라고 원문을 고친 것이다.
全州柳氏(陰竹派) 三代旌孝閭 立案
光緖十七年五月 日 禮曹立案
右立案爲孝子旌閭事節啓下敎曺啓目卽伏見議政院啓目啓下諸則去月二十八日 幸行時輩外上言人京畿道進士 朴建培 等 狀辭令該曹稟處□爲有等以玆孝狀辭則以爲柳時俊孝行卓異乞今褒旌事也 朴建培 狀辭內 陰竹 考 學生 柳時俊卽 世宗朝名臣吏曹判書 義孫之九代孫也 生而誠孝根天□纔十餘歲躬自耕讀供其甘旨其父嘗患腸□問於醫則曰常允可差於是日吮十餘次□根乃拔又思海蔘時際天寒□求不得夢有一老人謂曰若去東邊十里許必得所願覺而異贄依言而徃之則□有埋葬之人祭品果子海蔘以誠哀求則主人感其誠懇傾掇與之歸試有效是以□里之人皆曰柳孝子以其耶求必得故也又其母尹氏素嬰奇疾而家勢赤貧醫藥難辨聞陳姓人名於醫而遂徃訪之路見雙雉近人不飛因執而徃則醫方以其子之炳求雉未得擧家憂遑之際及見此物驚喜劑藥授以巨劑不論其價與雉相換歸以試用果有神效此非孝感之事乎觀此□事與古人之氷鯉雪筍有何少異至其遭考執喪行禮一如成人以其棺槨衣衾之未得遂意到老哀慟寢席之上常有淚痕此其終身慕親之誠也其時多士累呈營邑至於禮曹繡衣俱有褒題是乎施其曾孫 考學生 升休 天資近道至行美趾七歲學孝經小學便曉文義卽曰爲人之道盡在此書自是不離親側昏定晨省□凊朝灑未嘗戱言忘笑動靜云爲自有常度志氣卓荦異乎凣流連遭喪變凣十有二年身不脫哀麻之服口不絶哭位之声居哀奉祭一遵禮經訓人必以忠孝爲本居家以言行爲法閨門肅如隣里化之其子考學生禹文亦自兒時誠孝出人出過飮食未嘗先食其父有炳積年求藥以到報恩俗離山村日己暮矣訪僧之際忽有一老獲投以丹丸十箇視之則乃眞品藥砂等藥也問言不答因忽不見豈非異事乎其母金氏老産多病衣□垢汗躬自澣濯祝天嘗糞無所不至炳勢浸劇血指以進幾絶復生云云是如時俊升休禹文孝行実蹟幷如是卓異特施旌閭之典恐合樹風之政是白乎矣係于恩典臣曺不敢摽便上裁何如光緖十七年五月十三日同副承旨臣鄭世源次知啓依啓施行爲良如敎事批下敎是□旌閭堅立時材木匠工依例自官擧行爲施烟戶還上等諸般襍役一幷蠲除爲還合行立案者
判書 [手決] 參判 參議 正郎 佐郎
正郎 佐郎
광서 17년 5월 일 예조의 입안
위의 입안은 효자를 정려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절차에 따라 계를 내려 예조에 교시하였고, 예조에서 계목을 올리자 곧 의정부 계목과 계하된 모든 조항을 엎드려 보았다. 지난달 28일 행차(幸行) 때 신하들의 상언(上言) 중에서, 경기도 진사 박건배 등이 올린 상소문에서 해당 관청에 하명하여 처리하도록 하라는 등의 내용이 있었다. 이에 효행에 관한 상소문을 살펴보니, 류시준의 효행이 매우 뛰어나니 이번에 포상하고 정려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박건배(朴建培)의 행장(狀辭)에는 , "음죽(陰竹)에 사는 고(故) 학생 류시준(柳時俊)은 곧 세종 때 명신이자 이조판서인 의손(義孫)의 9대손이다. 나면서부터 성품과 효성이 하늘에서 비롯되었고, 재주가 있어 10여 세에 몸소 밭을 갈고 글을 읽으며 부모의 봉양을 다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장질(腸疾)을 앓아 의원에 물으니, '늘 사람의 똥을 맛보아야 낫는다'고 하였다. 이에 날마다 똥을 열 차례 넘게 맛보았고, 이리하여 병이 나았다.
또 해삼(海蔘)을 먹고 싶어 했는데, 때는 마침 날이 추워서 구하려 해도 얻을 수 없었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만일 동쪽으로 10리쯤 가면 반드시 소원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깨어나서 기이하게 여겨 그 말에 따라 갔더니, 그곳에 장례를 지내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물에 과자와 해삼이 있었다. 정성껏 애원하며 구하자 주인이 그 정성에 감복하여 해삼을 거두어 주었다. 돌아와서 드시게 하니 효과가 있었다. 이 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류 효자는 그 구하는 바가 지극하여 반드시 얻는구나'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의 어머니 윤 가 평소에 특이한 병을 앓았으나 집안 형편이 매우 가난하여 약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의원 중에서 진(陳)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찾아갔다. 가는 길에 꿩 한 쌍이 사람 가까이 와도 도망치지 않기에 잡아 가지고 갔는데, 마침 그 의원은 자신의 아들 병(炳)의 병환 때문에 꿩을 구하려던 참이었으나 구하지 못해 온 집안이 근심하며 허둥지둥하던 참이었다.
마침 그 꿩을 보고 놀라며 기뻐하여 약을 지어 큰 첩으로 주면서 값도 따지지 않고 꿩과 바꾸어 돌아와서 시험 삼아 써보니 과연 신기한 효험이 있었다. 이것이 효성으로 감동시킨 일이 아니겠는가?
이 일을 살펴보니 고인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은 일이나 눈 속에서 죽순을 캔 일과 어찌 조금이라도 다름이 있겠는가? 아버지를 여의고 상(喪)을 치르며 예법을 마치 어른과 같았다. 다만 관곽과 수의와 염포를 뜻대로 마련하지 못한 것을 늙어서까지 슬퍼하여 잠자리에 항상 눈물 자룩이 있었으니, 이는 그가 평생토록 어버이를 사모한 정성이다.
당시에 많은 선비들이 잇따라 고을(營邑)에 글을 올려 예조(禮曹)에까지 이르렀고, 암행어사도 모두 칭찬하는 글을 올렸려 그 증손자 학생(學生) 승휴(升休)에게 이를 시행한다. 그의 천성은 도에 가까웠고 지극한 행실과 훌륭한 자취를 남겼다. 7세에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배워 곧 문장의 뜻을 깨닫고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모두 이 책에 들어 있구나” 하였다.
이때부터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저녁에는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렸으며,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며(□凊)], 아침저녁으로 방을 쓸고 물을 뿌리는 일(朝灑)을 할 때에도 일찍이 농담이나 웃음으로 가볍게 넘기는 일이 없었다.
거처하는 행동과 몸가짐에 항상 일정한 도가 있었고, 뜻과 기개가 탁월하여 평범한 무리와는 달랐다. 거듭 상변(喪變)을 만나기를 무려 12년 동안이나 몸에서 상복(哀麻之服)을 벗지 않았고 입에서는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상을 치르면서도 제사를 받듦에는 오직 예경(禮經)을 철저히 따랐으며, 남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충효를 근본으로 삼았고, 집안을 다스릴 때는 말과 행동을 모범으로 삼았다. 안채(閨門)가 엄숙하니 이웃들이 그 감화(化)를 입었다.
그의 아들 고(考) 학생 우문(禹文) 또한 어릴 때부터 지극한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다. 음식을 먹을 때도 일찍 먼저 먹은 적이 없었으며, 그의 아버지 우병(禹炳)이 오랜 세월 병을 앓아 약을 구하러 이산촌(離山村)을 떠났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스님을 찾아뵙던 중에 홀연히 한 노인이 나타나 단환(丹丸) 10개를 던져주었다. 살펴보니 그것은 바로 진품 약사(藥砂) 등의 약이었다.
물어보아도 대답이 없고 이내 홀연히 보이지 않으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의 어머니 김씨(金氏)는 늙어, 낳은 자식으로 병이 많았고, 옷의 더러운 때와 땀을 직접 빨았으며, 하늘에 빌고 맛을 보며(嘗糞)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우병의 병세가 점점 심해져 손가락을 베어 피를 올려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시준(時俊), 승휴(升休), 우문(禹文)의 효행 실적이 모두 이처럼 탁월하고 남과 다르니, 특별히 정려(旌閭)의 전례를 베풀어 풍속을 바로잡는 정사를 세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에 은전(恩典)에 관계된 일이라 신(臣) 조(曺)가 감히 편의대로 처리하지 못하오니 성상(聖上)의 재결을 바랍니다.
광서17(1891)년 5월 13일 동부승지 신(臣) 정세원(鄭世源)이 아뢰니, "아뢰대로 시행하라"는 윤허의 교지가 내려졌다. 정려를 세울 때 재목과 목공은 예에 따라 관(官)에서 거행하고, 신호(煙戶)와 환곡(還上) 등 모든 잡역(雜役)을 일체 면제해 주도록 하라는 일로, 마땅히 입안(立案)을 작성한다.
판서 [수결 ] 참판 참의 정랑 좌랑
정랑 좌랑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 |
이천 율면 일문삼효정려(一門三孝旌閭)
| 전주류씨관리자 | 2026.08.11 | 4 |
| 8 | 사립함육학교를 설립한 류예근 선조님 교장을 하다 | 전주류씨관리자 | 2026.08.09 | 2 |
| 7 |
버들류씨 본관별 유명 인물
| 전주류씨관리자 | 2026.06.12 | 37 |
| 6 |
전주류씨 지정문화재
| 전주류씨관리자 | 2026.06.01 | 28 |
| 5 | 지파종중 홍페이지 주소 | 전주류씨관리자 | 2026.05.08 | 35 |
| 4 |
고양시제 홀기와 축문
| 전주류씨관리자 | 2026.04.08 | 47 |
| 3 |
상례약초[복사본]
| 전주류씨관리자 | 2026.04.01 | 50 |
| 2 |
문화재 지정신청서 예[종릉]
| 전주류씨관리자 | 2026.03.31 | 56 |
| 1 |
호암지 모음[직제학공파 종중]
| 전주류씨관리자 | 2026.03.31 | 6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