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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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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日記)/필자 미상

[소장처 : 한국국학진흥원]

회헌공[류의손]과 낙봉공[류헌]의 사당 건립 관련 일기

[번역문]

순조11(1811)년 3월 일

호남의 유림(儒林)이 회헌공[류의손]과 낙봉공[류헌] 두 선생의 도학(道學)과 풍절(風節)을 기리어 함께 배향(配享)하는 일을 추진하고, 황방산(黃方山) 소와정(笑臥亭) 유적지에 사당(祠堂)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전주(全州)의 여러 문중(門中) 사람들이 연명(連名)으로 경향(京鄕)의 각파(各派)에 통문(通文)을 발송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우리 소와당(笑臥堂)과 낙봉(駱峯) 두 선생의 문장·덕업·도학·절의는 비록 사람들의 눈과 귀를 밝힐 뿐만 아니라 모두 여러 현인의 문집에 실려 있다.

아!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전주의 선배들이 사당을 세우자는 논의를 주창하였으나, 여러 자손들이 각처에 흩어져 살고 지세가 한적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안타깝게도 포양(褒揚)의 전전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 개탄하고 한스러운 뜻을 어찌 다 말로 하겠는가" 하였다.

소와당(笑臥堂)은 지팡이와 신발이 닿던 곳으로, 전주 황방산(黃方山) 중턱의 너럭바위 사이에 있다. 이곳에서 도(道)를 강론하며 오로지 소요하고 영읍하는 것을 학업으로 삼아 이로 인해 정자를 짓고 '소와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행히 지난 겨울에 종중의 태환(台煥, 용인 묵계공파) 종친이 유적지를 살펴보고 가니, 옛 자취와 남은 흔적이 어제 일처럼 역연하였다. 그 후손된 자로서 사모하는 마음이 어찌 자연스레 배로 간절하지 않겠는가.

우리 고장의 종인(宗人)들이 이곳에 모여 마침 옛 정자(亭子)를 중수(重修)하려 할 때, 전주의 유림(儒林)들이 크게 이목을 집중하였다. 제사의 뜻을 받들어 먼저 뜻을 모아 통문을 보낸 이들은 당시의 문하생 제자들은 이미 사당에 배향하였으나, 유독 스승이신 선생에 대해서는 아직 포양(褒揚)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물며 우리 종중의 후손들이야 어찌 감격하고 분발할 도리가 없겠는가.

그러나 각처에 있는 친지와 후손들은 아득하여 알지 못하기에, 이에 통문을 보내어 특별히 종인 직철(直喆)과 황보(璜輔)를 파견하니, 오직 원하건대 제위 종친들께서는 경기(京畿)와 영남(嶺南)의 각 댁을 차례차례 돌며 순회해 주시고, 두 선생의 문집을 먼저 보내어 주시기 바라며, 아울러 향교의 문서와 영남의 통문(通文)에 대한 응답을 함께 발송하여, 전주 유림의 공론에 부응하고 큰일을 완수하는 터전이 되도록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참석자 명단

류 흡 류최강 류 발 류덕화 류 위 류석보 류용보 류 심 류 급

류갑보 류택□ 류 렴 류 린 류동표 류증술 류찬술 류 수 류 례

류한종 류정철 류 교 류언보 류 계 류인보 류익보 류규보 류전보

류도맹 류성학 류현춘 류현국 류수현 류수일 등。

순조15(1815)년 7월 일

전주에 영건별유사(營建別有司)를 설치했다. 김상의(金尙宜), 류수(柳洙), 이광악(李光岳), 이석채(李錫采) 등이 통문(通文)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충절을 표창하는 것은 조정의 법전(法典)이요, 도학을 높이 받드는 것은 사림(士林)의 공론입니다. 이제 충절과 도학이 함께 아름다운데도 아직 표창하고 제사 지내는 예절이 빠져 있다면, 어찌 백세(百世) 뒤의 조정과 민간에서 억울하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까?

소와당(笑臥堂) 류 선생과 낙봉(駱峯) 류 선생의 도덕과 학문은 국가의 역사와 야사에 실려 있으므로, 저희들이 낱낱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귀족(貴宗)은 그 자손과 친족·후예이시니, 보고 느끼는 바가 사림이 전해 듣는 것보다 반드시 갑절이나 더하실 것입니다.

소와당 선생의 유지(遺址)는 전주 서쪽 황방산(黃방山) 아래에 있는데, 바야흐로 건물을 다시 짓고, 낙봉 선생 또한 부(府)의 남쪽 원당동(院當洞)에 머무르셨으니,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는 일이 어찌 우리 고을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지팡이를 짚고 거닐던 곳에 제사 지내자는 논의가 사림에서 함께 일어났으나, 다만 일이 크고 힘이 미약하여 약간의 물자로는 시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통문을 보내오니, 바라건대 여러 존경하는 분들께서는 상례를 벗어나 넉넉히 도와주셔서 큰일을 이루도록 해 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순조17(1817)년 1월 3일

세알(歲謁, 설날 사당에 가서 인사드림) 시에 본손과 제손들이 모여 논의한 바, 회헌[류의손] 선조의 사우(祠堂)를 건립하자는 논의가 호남의 사림에서 여러 차례 제기되었고, 또 소와정(笑臥亭)을 재건하여 그 옆에 사우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숨겨진 덕을 드러내고 풍교를 떨치는 데 일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된 흉년으로 본사의 물력이 크게 어려워지고, 천리 먼 곳에서 호응하여 돕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이미 설치되어 있는 추원사(追远祠)에 함께 배향하여 옛사람들의 뜻을 이어받는 것이 사리(事理)와 인심(人情)에 진실로 부합합니다.

내년 봄에 길일을 택하여 거행하기로 기약하고, 위패를 감조할 유사(有司)로 류도문(柳道文), 제기를 감조할 유사로 류경문(柳經文), 상탁을 감조할 유사로 류정휴(柳程休)를 정하여 임명하였습니다.

순조18(1818)년 월 미상

세알회의(歲謁會議)에서 회헌(檜軒)의 위패를 모시는 봉안문(奉安文)은 수석정(漱石亭)의 참봉 이야순(李野淳)에게 청하여 짓게 하고, 상향축문(常享祝文)은 지강(芷江)의 교관 김시찬(金是瓚)에게 청하여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3월 중정(中丁) 중에서 길일을 택일하여, 유생 류휘문(柳徽文)을 보내어 예물을 갖추고 두 곳에 가서 청하도록 정하였다.

순조18(1818)년 1월 6일

사빈영당(泗濱影堂)의 통문(通文)이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이르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엎드려 아뢰옵건대, 기봉(岐峯) 류 선생께서는 위양(渭陽)의 어진 이들의 교화를 몸소 익히시고, 가문이 기울어 위태로운 시기에 절개를 세우셨습니다.

지극한 행실은 어린 시절부터 드러났고, 청렴한 이름은 한 시대에 뛰어났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의병을 이끌고 화살과 돌이 날아드는 위험을 피하지 않았으며, 세상이 평화로울 때는 성군의 교화를 읊으며 밭이랑 사이에서 스스로 즐거워하셨습니다.

덕행과 학문, 그리고 기개와 절조가 당대의 여러 선배들로부터 크게 추앙을 받았습니다. 식암(息菴) 황공(黃公)께서는 이르기를 '그 곧음이 화살과 같다'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한강(寒岡) 정선생이 이르기를, “함께 마음을 논할 만하다. 비록 그 자질과 품성을 하늘로부터 받은 바가 매우 두텁고, 기르고 채우는 바탕이 배우는 이로서 평소에 쌓인 바가 있으며, 물줄기가 깨끗한 이는 반드시 물결이 거세듯, 대저 어찌 근본이 있는 바가 없이 이렇겠는가.

거슬러 올라가면 회헌(檜軒)이 있으니, 곧 세상에서 일컫는 소와정(笑臥亭)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선생의 문장은 온 나라를 감동케 하였고, 경학(經術)은 여러 동료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세종(世宗) 때 집현전(集賢殿)에 선발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예문관의 임무를 맡았다. 세종 말년에 신병(身病)으로 물러나 소와정(笑臥亭)을 짓고 날마다 그 곳에 누워 시를 지어 뜻을 담았다. 그가 남긴 소와정(笑臥亭) 시 한 수가 인간 세상에 빠져나와 선비들 사이에 전송되니, 그 소리와 웃는 얼굴 밖에서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선생은 진실로 염치없는 자를 청렴하게 만들고 나약한 자를 분발하게 하여 백대의 스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 회헌(檜軒)이시여. 앞에서 기봉(岐峯)이 열어주고 뒤에서 고풍(高風)이 이어받았으며, 곧은 절개는 역사에 빛나고, 숨은 덕과 높은 명망은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도다.

이 조상에 이 후손이니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어갔음이여. 후인들이 높이고 사모함이 어찌 시간이 오래되고 가까운 것에 따라 차이가 있겠는가.

지나간 십여 년 전에 기봉 선생을 기양서당(岐陽書堂)에 배향(腏享)한 것은 진실로 자손들이 조상을 멀리까지 추모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요, 사림(士林)이 함께 높이는 뜻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 문중이 개탄해 마지않은 지 오래되었으나, 정중하게 논의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듣자니, 본가의 여러 현인들께서 또다시 회헌(檜軒) 선생을 기양(岐陽)에 모시고 함께 제사 지내려 한다고 합니다.

큰 논의는 이미 정해졌고, 예의를 갖춘 의식도 날짜가 임박했습니다. 이는 실로 신명(神明)의 뜻이 편안히 머무는 바요, 여론이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가만히 생각하건대, 함께 높이는 공론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새로 모시는 제사의 격식과 체모는 더욱 중중합니다. 그러므로 종손 측은 비록 신중을 기한다고 하더라도, 선비들이 스스로 그 일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원컨대 모든 군자께서는 이번 향음례와 제향 모임이 있는 날을 맞아 널리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여, 빨리 서원의 편액을 올릴 수 있게 해 주시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참석자 명단

도유사(都有司) 김시굉(金始宏), 제유사(祭有司) 김백운(金百運)

공사원(公事員) 권훈(權勳)과 김민철(金민喆),

제통(製通) 김조운(金祚運), 사통(寫通) 권호(權虎).

회원

金始樂 金纘運 權瑩 金宅運 金就運 金泰運 金正運 金鴻運 金斗壽

金弘喆 金浩運 金象運 金始奎 金象壽 金始敬 金始敎 南龜燦 金始陽

金始幹 金會運 金邦喆 金養運 權就仁 權擇仁 金廷喆 金兌運 金始堅

金和運 金致運 金錫運 權淑仁 權燂 權毅仁 金禎運 金鎭運 金世睦

金世振 南奎燦 金經運 金道壽 金希壽 金南壽 金應壽 金貞運 金昇壽

金民壽 金憲運 金南運 權熙 權熽 權樂進 金耳壽 金鍵壽 金鎭綱

金秉壽 金星壽 金潤壽 金周壽 金鎭德 權燮 金若運 金趾運 金秉運

金康壽 金鎭厦 等。

순조18(1818)년 2월 3일

호계향음주례 때 통사빈(通泗濱)에게 답한 글이다. 그 글에 이르기를, "삼가 보내주신 가르침을 받아보니, 회헌(檜軒) 류 선생과 기봉(岐峯) 류 선생을 함께 모시는 일과 서원의 격을 높이는 일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유림의 공론인데, 여러분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회헌 선생께서는 세종 때의 명신으로, 관직은 이조참판에 이르렀고, 말년에 전주 황방산으로 가서 은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봉(岐峯) 선생은 어려서부터 행실이 아름다웠고, 난리를 만나 깃발을 치켜들었던 절의(節義)는 진실로 온 지방에 칭송이 자자하며, 백대의 모범이 될 만하니, 정문목(鄭文穆)과 황식암(黃息庵)이 높이 평가하여 가르친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릇 두 선생의 덕행과 학문, 기절(風節)을 한 집안에서 이어받아 앞뒤로 아름다움이 빛나는데도, 아직 유림들 사이에 위패를 모시고 사모하는 곳이 없으니, 우리 문중의 원통하고 답답한 마음과 여론의 탄식이 일어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기양(岐陽)에서 제사를 함께 모시는 일은 비록 본가(本家) 여러 선현들이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려는 정성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우리 문중에서 오랫동안 울분처럼 쌓여 온 공론(公議)에 비추어 볼 때, 어찌 자손들이 사적으로 향불을 피우는 선에서 그치고 말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제현(諸賢)께서는 여론을 따라서 번거로운 예식을 속히 거행하시어 체통을 무겁게 하고 원호(院號)를 높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참석자 명단

공사원(公事員) 유학(幼學) 이심순(李心淳) 하석중(河錫中).

제통(製通) 이병진(李秉進). 사통(寫通) 이해응(李海鷹).

호계서원(虎溪書院). 원장 전참판 김희주(金熙周).

재유사(齋有司) 유학(幼學) 이의유(李義裕), 이정지(李庭芝).

구계서원(龜溪書院). 원장 유학 이만경(李晩慶).

경유사(京有司) 배명주(裴命周), 우종형(禹鍾衡).

노림서원(魯林書院). 원장 유학 이동(李垌).

삼계서원(三溪書院). 재유사 진사 권계우(權啓禹).

경광서원(鏡光書院). 원장 진사 이종주(李宗周).

묵계서원(默溪書院). 원장 유학 김홍철(金弘喆).

청성서원(靑城書院). 원장 전전적 홍종섭(洪宗涉).

도연서원(道淵書院). 원장 생원 권사양(權思襄).

타양서원(陀陽書院). 원장 유학 남시회(南時會).

회원

幼學 金正運 權信度 金泰運 李宇直 李光栗 權衛度 玉鉉應 李宇謙。李彙慶, 前參奉 李野淳, 幼學 李光壁 朴宗徇 朴宗成 金弼欽 李庭詩,前縣監 李秉運, 幼學 金樂顔 李光泂 金在璿 李雲祚 李長發 金琮燦,

前注書 朴宗範, 幼學 李周誠 金道洙 朴冕中 李海永 李海鎭 李海德 李周璋 李周珩, 生員 姜穆, 幼學 李重胤 李晉裕 徐有沆 鄭之宗 李仁秀 李彦裕 李秉極 尹光濟 李秉中 李秉玉 李周洛 南龜燦 金建銖 金永銖, 進士 李彙遠, 幼學 金在達 鄭仁木 李庭實 金若建 黃獜九 李珩 李庭蓂 李庭百 朴宗維 朴宗潤 金穆運 李顯道 李顯秀 琴五運 李顯仁 鄭之淑 南亨燦 李蓍秀 李庭雲 金庚燦 李相奭 南奎燦 李喬秀 李周民 安養周 李相壁 李秀德 徐元模 徐友輔 朴在中 金行敎 趙基暹 李大秀 裵顯溥 裵翰周 裵纘周 金民喆 金會運 金邦喆 朴宗淵 金顯迪 李相聖 李相琦 裵顯復 金慶奎 權勳 權熽 朴根中 朴夏壽 李洛秀 朴之喆 李相莘金祚運 權台度 金在勖 朴觀中 朴恒中 裵鳳周 金鎭綱 金利壽 李厚秀李最秀 李秀億 金檜壽 金沂進 金德壽 金鶴壽 李海兼 李邦秀 李元宇李周瓚, 生員 裵相逵 權遇準 等

순조18(1818)년 2월 20일

봉안문 및 상향축문이 도착했는데 봉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각하옵건대 우리 선조께서는,

산천의 영기를 타고나시고

별의 정기 정수를 모으셨도다.

영릉의 성대한 시대를 만나시어,

집현전의 선배가 되셨네.

나아가서는 경연에서 임금을 보좌하고,

물러나서는 붓끝으로 울림을 주셨도다.

통감강목과 춘추를 지어

그 끝을 빛나게 하셨네.

승정원의 울타리가 되시고,

풍월 읊는 기둥이 되시어,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도다.

바람이 몰아치고 우뢰가 진동하네.

이때 동료들과 옥(玉) 같은 시(詩)에

금(金) 같은 시(詩)로 화답하였네.

동료들은 누구인가?

박(朴) 씨와 성(成) 씨,

또 절재(節齋)와

안평(安平)이라네.

한산(韓山)과 영양(永陽)

또한 갈고 닦음을 함께했으니,

비록 문장뿐만이 아니라

그 얼마나 뛰어난 영웅호걸들인가!

발자취는 비록 아스라하나,

이것으로도 족히 증명되거늘,

더욱 큰 것이 있도다.

유독 웃으며 정자에 누워,

계유년(癸酉年)을 어찌 맞이할꼬 하며

조정에 사직을 고하였네.

기미(幾微)를 밝게 살피고

미묘한 조짐을 촛불처럼 훤히 보았으니,

봉황은 숨고 기러기는 아득히 날아간 격이네.

천지간에 유유자적하며 숲과 들판에서 속세를 벗어나 노니네.

검소한 덕으로 화를 피하였으니,

크게 길하고 정숙함을 온전히 하도다.

바위처럼 세상일에 귀를 닫고 눈을 감았네.

헌눌이 응답하네.

태재에게 핑계를 대고,

귀한 벼슬을 티끌처럼 가볍게 여겨,

웃음을 머금고 바다를 건너네.

땅 이름은 의정이라 하고,

유언으로 묘표를 남겼네.

세종 때의 아경이라,

마음은 소나무와 측백나무 같고,

옥으로 만든 패물의 빛을 감추었네.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 조용히 지키니,

사람들이 칭찬할 이 없네.

오직 유정(惟亭)만이 시를 남겼네.

별처럼 높이 걸려 있네.

함께 장미와 노래하리.

만고의 바람은 맑고,

현명한 이의 보전이며,

거센 물결을 막는 기둥이네.

깊기는 연못과 바다 같고,

해와 달은 서로 다투듯 하네.

나는 그 근원을 찾아

주자의 학문을 표준으로 삼으니,

그에 참된 과녁이 있도다.

문희공의 외손이요,

숨겨진 진실함은 참되고 하나이네.

가문을 이어 문정(門庭)을 빛내고,

낙봉(駱峯)을 또한 넘었네.

기개와 절조는 우뚝하고,

문채는 빛나며 받아들임이 아름다워라.

암묵(巖墨)과 호평(湖萍)이요,

한귀(寒龜)에 이르러서는

연원의 흐름이 더욱 밝아졌도다.

아, 성대하도다!

그 누가 다른 평가를 하겠는가.

아스라이 흘러

어느덧 4백 년이 흘렀네.

당시의 동료와 벗들이여.

모두 이미 영화를 누렸으나,

유독 자취가 다르고

홀로 시호를 받는 일에서 어긋났으니

그 책임은 미천한 후손에게 있도다.

통곡과 슬픔이 얽히고설켜

대략 남은 자취를 주워 모아,

원고를 판각하게 하니,

아름다움을 드날리려 함이 아니라

애써 모범을 의탁하려 함일 뿐이로다.

아, 지극한 덕이여!

사당에서 누림이 일찍이 없었으니,

여론이 울적하도다.

나라의 제도를 감히 거스르지 못하니,

오직 동(董) 씨가 일을 진술하여

후세의 인심을 일으켰도다.

돌아보건대 이 기양(岐陽)은

모두 우리의 대문과 빗장이로다.

능히 남쪽 땅을 번성하게 하여

은택이 흘러넘치고 고이게 하였으니,

보답하고자 하는 소원은

부모 형제 때부터 비롯되었으나,

우연히 겨를이 없어

우리 대에 이르러서야 이어지게 되었도다.

이에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여 도모하니

향기로운 향을 바치고,

번거로운 의식을 거행하네.

영령의 기운 받드는 듯,

함께 아름다운 제기를 올리네.

귀한 손님과 친구들 모여들고,

사당 또한 다행스럽구나.

새로 지을 필요도 없이,

오직 후손 기봉(岐峯)이 이었네.

파초와 여지처럼 일찍이 향기로웠으니,

조상이 후손의 집에 드시어

그 명성을 더욱 빛내네.

영정을 오른쪽에 모셨네.

정신이 맑고 상쾌하여 고요함에 이르네.

황산(黃山)의 단풍과 방산(方山)의 산빛은,

마치 나란히 옮겨다 바치는 듯하네.

하늘의 기운은 너무나 밝고 뚜렷하며,

대대로 영원히 평안하리라.

내 잔에는 술을 가득 따르고,

내 제기(祭器) 그릇에는 제수를 가득 담았네.

우리의 열린 복을 돈독히 하시고,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살피소서.

순조18(1818)년 3월 18일

향도(鄕道)의 유림(儒林)들이 모두 모여 행단 아래에 자리를 열었다. 공사원 김홍규, 김정운. 추천으로 도집례에 임명된 전 참봉 이야순, 찬자(집례 보조) 하석구. 직일(당번) 이해영, 권훈, 김헌운, 류기문, 조사(제사 실무 담당) : 김양휴, 권호, 김부수, 이시수, 남희운, ○기, 이 참봉.

기봉(岐峯)공 위패 봉안문에서 이르기를, "홀로 나신 우리 조상님, 근원을 환히 밝히셨네. 자손들이 이어받아 구함은 진정 회헌(회헌 안향)을 모범으로 삼음이네. 그 절개는 특별하고, 그 덕은 높으며, 그 은택은 두터우니 백세가 되어도 비견하기 어려우리. 진씨의 사당처럼 옛 예를 이미 따랐으니, 이제 그분을 향사 우측에 모시니 정성과 예가 모두 온화하도다. 엄연히 한 방에 조상과 훌륭한 손자가 함께하니, 기자(기자조선)의 가르침을 더욱 넓히고 집안의 문호를 더욱 빛내누나. 저승과 이승이 간격이 없으니, 다 함께 기뻐하노라. 이에 길일을 받아 제물과 술독을 함께 올리니, 만년토록 은혜와 의리가 더욱 돈독해지리라."

순조18(1818)년 3월 19일

아침에 회좌(會座)를 열었다. 정식으로 집사(執事)에게 고유문(告由文)을 내리도록 하였고, 축(祝)은 생원 조언유(趙彦儒), 봉향(奉香)은 김민철(金民喆), 봉로(奉爐)는 이해욱(李海旭)이었다.

고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아뢰옵건대, 선조 회헌(檜軒) 선생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 오랫동안 겨를이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조상과 후손이 함께 배향되는 것이 진실로 신도(神理)에 부합하므로, 바야흐로 밝은 정사년(丁巳)에 (위패를) 오른쪽으로 올라가 받들어 모시려 하니, 감히 그 연유를 삼가 고합니다."

아침 식사 후. 다시 행단(杏壇) 앞에 자리를 잡았다. 정해진 직책인 조사(曹司) 5명은 김성수(金聖壽), 류배문(柳倍文), 김낙진(金洛鎭), 권행진(權行進), 권택량(澤亮)이다.

도집례(都執禮)가 제 집사들을 추천하고. 위판(位版)을 적었다. 유학(幼學) 김홍관(金弘觀), 이우겸(李宇謙), 이용연(李隆延), 전 전적(典籍) 류치명(柳致明). 위판을 받들었다.

전 지평(持平) 박시원(朴時遠), 주서(註書) 박종범(朴宗範) 의자(椅)와 탁자(卓)를 받들었다. 유학 류도문(柳道文), 김시규(金始奎). 상탁(床卓)을 받들었다.

이시수(李蓍秀), 신옥(申沃), 김부수(金富壽), 류정휴(柳程休), 김도희(金道希), 권준(權濬), 정연하(鄭延遐), 남희적(南熙迪). 상의(司儀). 생원 김성련(金星鍊).

초헌관(初獻官)은 류익휴(柳翼休). 아헌관(亞獻官)은 김시홍(金始宏). 종헌관(終獻官)은 류경근(柳經根). 축관(祝)은 생원 김양운(金養運), 진사 이형진(李亨鎭). 찬자(贊者)는 하석구(河錫九). 알자(謁者)는 옥현성(玉鉉成). 찬인(贊引)은 박종윤(朴宗潤), 권택인(權擇仁)이다.

회헌위(檜軒位) 진설(陳設)은 박종현(朴宗絢) 권범락(權範洛) 하진익(河震翼) 권시필(權時駜) 김양극(金養極) 이휘경(李彙慶) 김도순(金道淳)이고, 분향(奉香)은 서활(徐活). 봉로(奉爐)는 김진수(金晉壽). 봉작(奉爵)은 이상규(李祥奎). 전작(奠爵)은 권해도(權海度). 사존(司尊)은 류회환(柳會煥), 남대박(南大樸), 신정열(申廷烈), 이의유(李義裕)이다.

기봉위(岐峯位) 진설은 옥현응(玉鉉應) 정인목(鄭仁木) 권규탁(權規卓) 정운(鼎運) 김진유(金晉裕) 김도련(金道鍊) 신연수(申延壽). 봉향(奉香)은 김양휴(金養休). 봉로(奉爐)는 김회운(金會運). 봉작(封爵)은 김양윤(金養綸). 전작(奠爵)은 생원 류성규(柳星奎). 사존(司尊)은 유학 박춘수(朴春壽) 권율도(權律度) 배익주(裵翼周) 류가진(柳家鎭). 공급(供飯)은 류병문(柳炳文) 김관수(金觀壽). 장성(掌牲)은 우종형(寓鍾衡) 류사문(柳思文). 척기(滌器)는 우종원, 이해응, 류한문, 이우박, 김낙진, 류지휴, 전부사 류범휴, 유학 김찬운 김취운 김삼운 류낙휴 류규문 김홍규 김정운 김상수 이우직 권상철 김호운 류현휴 김방철, 생원류구휴, 유학 류기원 류오원 김시경 류정휴 박종성 류연휴 서락 류치양 류대원 김시교이다.

오후에 다시 모여 앉았다. 공사원(公事員)을 추천했는데 생원 김성련(金星鍊)과 진사 이형진(李亨鎭)이다. 본당(本堂)에 향을 올리는 일은 진실로 자손들이 조상을 멀리까지 추모하는 정성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림(士林)은 아직 함께 높이고 공경하는 의리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전날 사원(泗院)의 통문(通文)과 호계(虎溪)의 답통(答通)에 모두 신주(神主)의 호칭을 높여 올리자는 의 뜻이 있었다. 이제 여러 의논이 번거롭게 예의를 차리는 날에 마침내 의논이 또 엄숙하게 제기되었다.

이 뜻을 가지고 본손(本孫)과 왕복하며 논의하였는데, 본손 역시 행단(杏壇) 안에 모여 앉았다. 류휘문(柳徽文)을 시켜 도석(道席)에 말을 전하게 하여 이르기를, "전날의 공론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나, 이곳은 본래 사당(私廟)의 시설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규모가 어수선하여 아직 실마리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당장은 감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받들어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도유(道儒)가 유사(曹司)에게 시켜 본손에게 다시 회답하게 하였으나, 본손은 신중을 기하는 뜻이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굳고 확고하였다. 사림 역시 부득이하게 '일단 후일을 기다리겠다'는 뜻을 본손에게 통보하고 마침내 모임을 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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