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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중 공지사항

대종중 공지사항

전주류씨 보계변증

전주류씨관리자 2023.08.24 14:08 조회 수 : 334

전주류씨보계변증(全州柳氏譜系辨證)

[병자보(1876년)에서 발췌]

十六代孫炳文謹撰

吾柳本出全州而中間有自文化移籍之說今博考詳證正其謬誤如左 

謹按麗史有貞簡戴肅莊定三平章事列傳俱稱全州人輿地勝覽亦收入於全州人物

條在檜軒眞一齋之上且杏村李公手寫完山柳仁雨之詩而見於海東名蹟則全州有

柳厥惟久矣豈可謂至掌令公而爲移籍之始乎以年代推之貞簡公仕成宗朝己爲禮

部侍郞而距開國不過六十餘年矣其時世切近於大丞而當世史筆旣不言大丞之親

屬則文化全州之二本於玆决矣又按牧隱李公與寶文公同朝而其時已稱全州柳氏

其後虎巖梧桐坊鍾陵黃竹里及署令眞一齋全陽公墓碣及遺逸齋壺隱墓誌及駱峯

諡狀澤堂集幷不言文化移籍事檜軒典翰科榜目只稱本全州而吾派落南以後忽稱

系出文化移籍全州今埀二百餘年而莫克釐正凡散見於各派狀碣文字者指不勝屈

可勝歎哉

◯虎巖碣文曰公姓柳諱克恕系出全州[萬曆丙午後孫觀察使永詢撰]

◯鍾陵碣文曰公姓柳諱濱系出全州[上同]

◯梧桐坊碣文曰延安亦完山大姓也[萬曆丙辰郡守李成吉撰]

◯遺逸齋墓誌曰先生諱坋系出完山[正德壬申文平公李繼孟撰]

◯署令[之盛]碣文曰柳爲完山望族有諱濕贈掌令當麗季積慶毓祉五子一壻俱捷

  文科妻封三韓國大夫人云云[弘治庚申提學權健撰]

◯眞一齋神道碑曰其先出完山高麗末諱濕積慶于家云云[正德壬申晉川君姜渾

  撰]

◯壺隱墓誌曰公姓柳名堪完山人也[隆慶己巳嘯皐朴承任撰]

  右七條誌碣俱出於萬曆以前而不言文化分貫之事

◯黃竹里碣文曰公諱末孫系出全州有諱濕贈掌令寔爲我柳氏鼻祖[明陵乙未後  

  孫縣監近撰]

○駱峯諡狀曰公諱軒系出完山[年月及撰人未詳]

○全陽墓碣曰柳氏系出全州自麗朝簪組相繼[從子觀察使恒撰]

○澤堂集曰柳氏本全州至麗季直提學克恕益顯

○墨溪旌閭碑曰公字君瑞完山人[陶菴李縡撰]

  右五條俱是萬曆以後文字而亦不擧移籍之事其他畿湖宗人狀碣未見有文化二 

  字而安東兩派狀碣每每必書者何也

○牧隱集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云云全州柳氏曰克剛曰克恕曰克濟

  按譜牒云至諱濕移居全州因貫其邑子孫以爲始祖蓋掌令公未嘗立朝顯仕則必  

  無君上賜籍之理特以移居之故因貫其邑子孫以爲始祖則牧隱之時全州新貫未  

  著於世矣何以捨文化而稱全州乎除是全州之柳顯于麗代前有三平章後有宰臣  

  柳仁雨而寶文公兄弟同是一柳故牧隱因是稱之只此一段亦可爲大證案矣

○宣德丙午文科榜生員柳義孫全州人[禹秋淵性傳家藏]

○成化丙午司馬榜幼學柳軾本全州

○正德丁卯文科榜江陵判官柳軾本全州

  按典翰公以前皆稱全州人則落南後戶籍何故處稱文化耶

  謹按上世所傳如右略不及文化二字若果分貫於文化則近古文蹟中豈可全無一  

  證乎此以下歷敘受誣之所由而因輒條辨焉

○安東藏晉柳譜曰全州晉州瑞山柳皆大丞車達之後失其世代至濕移居全州因貫  

  其邑

  按此條柳僉正錫昌氏通諭文辨之詳矣竊意此晉柳譜出於安東而其說如此故安  

  東居兩派首先徵信書譜戶籍及於鶴峯集而京中他派未及知之至全平君修譜時  

  遂以邦直橒二代書於譜牒之首又其序文曰至大丞而起於儒州至掌令而興於完  

  山於是僉正直斥其非今其文錄在卷中可攷而知也

○柳承緖家牒曰始祖車達高麗大丞子孝金左尹子金奐大將軍子盧一檢校大將軍

子寶春少監子寵少監子公權參政文簡公子彦琛密直使子淳翰林學士子成庇文山

君子湜宰臣子安澤判官子寬古名觀右議政子邦祐邦輔邦直邦祐子樞邦直子橒梓

樑橒子濕津濕全州柳氏梓晉州柳氏樑渾澈渾瑞山柳氏

  右牒郡守金公啓光得於義興人李琪林李得於淸道郡守柳信男柳得於兵使柳承  

  緖兵使得於文化族譜中云文化古今譜邦祐以下十二名皆幻忘無稽◯按邦直橒  

  二代名啣旣不載文化譜則明是後人白撰而虎巖碣文始書橒字壬辰譜首又加邦  

  直此固大未安者而二丙午譜之所以不錄於世系之首者然

◯文化己巳譜自車達至淳[幷同上]淳子良梓[或云全州君]仁庇[晉州派]

  按全州君之說疑似難辨然就考永樂譜[辛丑右代言穎所撰]嘉靖譜[壬戌僉正  

  希潛所撰]而俱無之其誤必矣大凡古無而今有者若無明據則儘是杜撰况或之  

  而疑之者乎

柳僉正錫昌[府使冕府使曼]通諭文曰安東藏晉柳譜曰云云[見上]而攷譜晉州大  

族譜則僉正柳希潛曰彦琛爲移居晉州之始而彦琛之曾孫塘湜之后皆貫文化則彦

琛之非晉柳之始明矣云云又攷安東柳宗禮所藏晉柳譜則亦無全晉瑞三柳分貫之

說又攷文化大族譜則柳寬子孟聞季聞季聞子嘇晥而已無寬子邦直邦直子橒梓樑

分貫三邑之處所謂皆大丞車達之後者非臆見則妄也審矣然則晉柳之不本於文化

亦明矣全柳之本於文化之說其可信乎

  按通諭文斷然以全柳之本於文化爲非而未盡處猶有四條一則曰文化柳邦直云  

  云而初不審邦直橒名啣之白撰一則曰柳寬子孟聞季聞而初不辨柳寬時世之倒  

  著一則旣擧彦琛爲晉柳之始又引橒梓樑分貫之事而初不覺二說之判然相左一  

  則不言全柳之昉於麗初凡若此類俱可見攷據之未備然亦足以知分貫之說古無  

  而今有也

文獻備考全州之柳本出文化

  按此書卽正廟朝命儒臣撰進者也此書所錄雖如此然儒臣非別有所見而然也只  

  是吾柳近世所傳如是故依而錄之覽者不宜據此以爲斷案也

柳參判誼家史所引永慕錄曰柳寬子邦祐而邦祐乃麗朝人寬卽我朝右議政前後大

異似是誤傳文化譜元無邦祐◯或謂文化來歷未詳全州之柳元是別派

  按永慕錄未詳誰作而其說如此古人亦已覰破矣按全柳之昉於麗初而顯於中

  葉者如此雖其譜系失傳無由詳攷然文化分貫之說不得也證而自破矣◯家弟徽  

  文曰全晉柳同出文化之說蓋以晉柳爲文柳之女婿全柳爲文柳之外孫婿而幷載  

  文柳之譜故或者錯看胡說遂有分貫之疑旣誤晉柳又誤全柳而晉柳旋覺其非全  

  柳尙未解惑甚矣流傳之說不可輕信如此且不但全柳爲然今一國之以柳爲姓者  

  靡然自附於大丞之後而曰柳無他姓誤之者晉柳譜也然則麗太祖國舅柳天弓亦  

  可謂大丞之一柳乎 

 

[번역문]

전주류씨 보계변증

  우리 류씨는 본래 전주에서 출계(出系)하였는데 중간에 문화(文化)로부터 적(籍)을 옮겼다는 설(說)이 있어 지금에 와서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변증하여 그 잘못된 것을 아래와 같이 바로 잡았다.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면 정간공(貞簡公, 류방헌), 대숙공(戴肅公, 류광식), 장정공(莊定公, 류소) 세 평장사(三平章事)의 열전(列傳)이 있는데 모두 전주인(全州人)이라고 되어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전주인물조”에도 빠짐없이 들어있으며, 회헌공[류의손]과 진일재공[류숭조]의 윗단에 실려 있다.

  또한 행촌 이공(李公)이 완산 류인우(柳仁雨)의 시(詩)를 베껴 놓은 것이 해동명적(海東名蹟)에 실려 있으므로 전주류씨의 존재는 오래된 것이다. 그러하니 어찌 장령공에 이르러 이적(移籍)한 것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연대로 추정해도 정간공[류방헌]이 고려의 성종 시대에 벼슬을 하여 이미 예부시랑이 되었고 고려 개국과는 시간적인 차이가 60여년에 지나지 않아 그 때가 대승공 차달의 시대와 아주 가까운데도 그 당시의 역사가들이 대승공의 친족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곧 문화와 전주는 따로 2본인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또 살펴보건대 목은(牧隱) 이공(李公)이 보문공(寶文公, 류극서)과 함께 같은 고려조정에서 벼슬을 할 때 이미 전주류씨라고 말한 바 있고 그 후 호암[류극서], 오동방[진주하씨], 종릉[류빈], 황죽리[류말손] 등의 묘갈문, 서령[류지성], 진일재[류숭조]와 전양부원군[류영경] 묘갈, 유일재[류분] 및 호은공[류감] 묘지(墓誌)와 이식(李植)의“택당집”에 실려있는 낙봉공시장(駱峯公諡狀)에도 우리 전주류씨가 모두 문화에서 이적하였다는 말은 없다.

  참판[전한] 벼슬을 지낸 회헌공의 문과방목에도 역시 전주가 본관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우리 전주류씨문중이 남쪽으로 낙향한 이후 갑자기 문화류씨로부터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전주로 이적(移籍)한지 200여년인데 이를 곧바로 고치지 못하고 모든 각파의 장갈문(狀碣文)에 계속하여 쓰고 있으니 크게 개탄하는 바이다.

○호암공[류극서] 묘갈문에는“공의 성은 류요, 이름은 극서(克恕)이며, 계    출은 전주이다. 선조39(1606)년에 후손 관찰사 류영순이 짓다”라고 쓰    여있다.

○종릉[류빈] 묘갈문에는“공의 성은 류씨요 이름은 빈(濱)이고 계출을 전    주이다”라고 쓰여 있다.

○오방동[진주하씨] 묘갈문에는“연안(延安, 류극서)도 역시 완산의 큰 성    씨이다. 광해군8(1616)년에 군수 이성길이 짓다“라고 쓰여 있다.

○유일재공[류분] 묘지(墓誌)에는“선생의 이름은 분(坋)이고 계출은 완산    이다. 중종10(1515)년 문평공 이계맹이 짓다.”라고 쓰여 있다.

○서령 류지성의 묘갈문에는“류씨는 완산의 명망 있는 가문으로 류습이     장령으로 증직을 받았고 고려 말에 가문에 경사가 거듭되고 복된 터전     이 갖추어져 다섯 아들과 사위 한 분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그의 처     는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다. 연산군6(1500)년 제학 권건이 짓다.”라      고 쓰여 있다.

○호은공[류감]의 묘지에는“공의 성은 류요, 이름은 감(堪)이며 완산인이    다. 선조2(1569)년 소고 박승임이 짓다”라고 쓰여 있다.

  위 일곱 분의 묘지(墓誌)와 묘갈(墓碣)은 모두 1573~1619년 이전에 쓰    여진 것인데도 문화에서 분관되었다는 말은 없다.

○황죽리[류말손]의 묘갈문에는“공의 이름은 말손(末孫)이요 계출은 전주    이다. 습(濕)이 장령으로 증직되었는데 이 분이 우리 류씨의 시조가 된     다. 숙종41(1715)년 후손 류근이 짓다.”라고 쓰여 있다.

○낙봉공[류헌] 시장(諡狀)에는“공의 이름은 헌(軒) 이요 출계는 완산이     다”라고 쓰여 있다.

○전양부원군[류영경] 즉 춘호상공의 묘갈문에는“류씨는 계출이 전주이며,    고려 때부터 빛나는 벼슬이 이어졌다. 종자 관찰사 류항이 짓다”라고 쓰    여 있다.

○택당집[이식]에“류씨 본관 전주는 고려 말에 이르러 직제학 극서(克恕)    가 더욱 현달하였다”라고 실려 있다.

○묵계공[류복립] 정려각의 정려기(旌閭記)에는“공의 자는 군서이고 완     산인이다. 도암 이재가 짓다”라고 쓰여 있다.

  위 다섯 항목은 모두 1619년 이후에 쓰여진 금석문(金石文)인데 역시 이    적(移籍)은 거론되지 않았고 경기도와 충청도에 거주하는 일가들의 행장    과 묘갈문에도 문화라는 두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오로지 안동에     사는 두 파의 모든 행장과 묘갈문에만 반드시 쓰여져 있는 것은 무슨 까    닭인가?

○목은집[이색]의“하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에    이르기를“세 아들이 나란히 문과에 급제한 가문으로는 이들 죽계안씨     뿐 아니라 전주류씨의 극강, 극서, 극제가 그들이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족보에 말하기를“습(濕)에 이르러 전주로 이거(移居) 하여     그 읍호를 관으로 하고 자손들이 시조로 삼았다”고 하였다.

  상상해 보건대 장령공은 관직이 없었고 현달한 일이 없었는데 임금이 적    (籍)을 하사했을 리는 필연코 없었을 것이고 특히 이거 하였기 때문에     그 읍호를 본관으로 하고 자손들이 시조로 하였다고 한다면 곧 목은(牧    隱) 시대에 전주로 새로운 관을 삼은 것이 세상에 드러날 수 없을 것인    데 무엇 때문에 문화(文化)를 버리고 전주(全州)라고 하였겠는가?

  이를 제쳐놓고도 전주류씨는 고려조에 현달하여 앞에는 세분의 평장사가    있었고 보문공[류극서] 형제도 목은[이색]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가문인    류씨이므로 이 때문에 전주류씨로 칭하였으니 단지 이 한 줄의 글로도     크게 증명될 안건이라 할 것이다.

○세종8(1426)년 문과방목에“생원 류의손(柳義孫)은 전주인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 방목은 추연 우성전의 가장본이다] 

○성종17(1486)년 사마방목에“유학 류식(柳軾)은 본관이 전주이다”라고    쓰여 있다.

○중종2(1507)년 문과방목에“강릉판관 류식은 본관이 전주이다”라고       쓰여 있다.

  살펴보건대 전한공[류식] 이전에 모두 전주인이라고 호칭하였다면 남쪽    으로 낙향한 후 호적을 무슨 이유로 갑자기 문화로 바꿔 불렀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선대에서 전해온 것이 위와 같은데 대략이라도 문화 두 글자    는 언급이 없었으니 만약 문화에서 분관을 하였다면 오늘이나 옛날의 문    적 중에 어찌 한 낱의 증명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겠는가? 다음에는 거    짓이란 사유를 역력히 서술하여 조목조목 변증하기로 한다.

○안동에 소장되어있는 진주류씨족보에는“전주(全州), 진주(晉州), 서산     (瑞山) 류씨는 모두 대승공 차달의 후손인데 그 세대를 실전하였고 습     (濕)에 이르러 전주로 이거(移居)하여 그 읍호를 본관으로 하였다”라      고 쓰여 있다.

  살펴보건대 이러한 기록은 첨정 류석창(1609~1687년)씨의 통유문(通諭    文)에 변증(辨證)한 것이 상세히 기술되어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진주류씨족보가 안동에서 출간되어 이와 같은 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안동에 사는 양파(兩派) 족보의 책머리에 확실치 않은 말만 믿    고 호적과 학봉집에 실었으나 서울의 다른 파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전평    군[류심]이 족보를 만들 때 마침내 방직(邦直)과 운(運) 두 대(代)를 족    보의 책머리에 기록하고 또 그 서문에 쓰기를“대승공[류차달]에 이르러    유주에서 일어났고 장령공[류습]에 이르러 완산에서 흥하였다”라고 하    였으나 첨정공이 곧바로 그 잘못된 것을 배척하였는데 그 문록이 책 속    에 기록되어있어 자세히 고찰하여 알게 되었다,

○류승서의 가첩(家牒)에 이르기를“시조 차달은 고려의 대승이요, 그 아     들인 효금은 좌윤이요, 효금의 아들인 금환은 대장군이요, 금환의 아들     노일은 검교 대장군이요, 노일의 아들 보춘은 소감이요, 보춘의 아들       총은 역시 소감을 지냈고 그의 아들 공권은 참정으로서 문간이란 시호     를 받았고 아들 언침은 밀직사이고 아들 순은 한림학사요, 아들 성비는     문산군이란 군 호칭을 받고 아들 식은 재신의 반열에 올랐으며, 아들      안택은 판관을 지냈으며, 아들인 관(寬)의 옛 이름은 관(觀)이었는데 우    의정을 지냈다. 그의 아들이 방우(邦祐), 방보(邦輔), 방직(邦直) 3형제     인데 방우의 아들이 추(樞)요, 방직의 아들이 운(橒), 재(梓), 량(樑) 3     명인데 운의 아들이 습(濕), 진(津) 형제이니 습은 전주류씨가 되고 재     는 진주류씨가 되었으며, 량의 아들 형제 즉 혼(渾)과 철(澈) 두 아들      중 혼은 서산류씨로 분관되었다”라고 쓰여 있다.

  위의 보첩은 군수 김계광이 의흥인 이기림에게서 얻었고 이씨는 청도군    수 류신남에게서 얻었으며, 류씨는 병사 류승서에게서 얻었다고 했다. 또    한 류병사는 문화류씨족보 중에서 얻었다고 말했는데 문화류씨의 옛날     족보나 오늘날의 족보에 쓰여 있는 방우 이하 12명의 이름은 모두가 실    체가 없는 망발이어서 자세히 고찰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 살펴보건대 방직(邦直)과 운(橒) 2대의 이름은 문화류씨족보에도 실    려 있지 않으니 이것은 분명히 사람들의 말만 듣고 지어낸 것이다. 호암    공[류극서] 묘갈문에 처음으로 운(橒)자가 쓰여 있고 임진보 책머리에도    방직(邦直)을 추가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미안한 일이겠으나 두    번에 걸쳐 발행한 병오보의 세계(世系) 첫 줄에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문화류씨 기사보[己巳譜, 숙종15(1689)년]에 류차달(柳車達)로부터 순     (淳)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상기(上記)와 같고 순(淳)의 아들인 양재(良     梓)는 전주군(全州君), 인비(仁庇)는 진주파로 되어있다.

  살펴보건대 양재“전주군(全州君)”에 대한 설은 매우 의심스러워 변증    하기 어려울뿐더러 세종3(1421)년에 우대언 영(穎)이 만든 “영락보(永    樂譜)”와 명종17(1562)년에 첨정 류희잠이 찬(撰)한“가정보(嘉靖譜)를    놓고 자세히 살펴보아도 모두 위와 같은 내용이 빠져있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옛날에 없었다가 오늘날에 와서 있는 것은 만약 확실한 근거가 없다면     이들은 모두 진실이 아닌 거짓 저술이 되는 것인데 하물며 극히 의심스    러운 것이야말로 재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첨정 류석창씨 그리고 부사 류면, 부사 류만의 통유문(通諭文)에 이르되    안동에 소장된“진주류씨족보”에 이르기를“전술한 것을 보라”. 진주    류씨의 여러 대족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곧 첨정 류희잠이 말하기를“언    침이 진주로 이거한 입향조라고 하였으나 언침의 증손자인 당시의 후손    들 모두가 문화류씨로 본관을 삼고 있으니 그렇다면 언침이 진주류씨 시    조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또한 안동의 류종례씨가 소장하고 있는 진주류씨족보를 고찰하면 역시     전주, 진주, 서산의 삼류(三柳)의 분관설이 없다. 또 문화류씨족보를 보    면 곧 류관의 두 아들 맹문, 계문만 나와 있고 계문의 두 아들 참과 완    이 쓰여 있을 뿐 관의 아들이라는 방직과 방직의 아들 운, 재, 량에서 분    관 되였다는 세 읍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따라서 전주류씨 등이 모두 대승공 차달의 후손이라고 한 것은 실로 억    측의 견해가 아니면 망설인 것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주류    씨의 뿌리 또한 문화류씨가 아닌 것이 명확한 것이니 전주류씨의 연원이     문화류씨라는 설은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통유문(通諭文)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연코 전주류씨의 근본이 문화류씨    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릇된 것이요, 더 자세하지 못한 것 네 가지 조목이    있으니,

  첫째 문화류씨측에서 류방직 운운(云云)하였지만 처음에는 방직(邦直)과    운(橒) 등 이름의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둘째 류관의 아들은 맹문과 계문이나 처음에 류관 당시의 세대가 거꾸로    놓인 것을 변증하지 못하였다.

  셋째 이미 언침을 들어 진주류씨의 시조로 하고 또 운, 재, 량을 끌어들    여 본관이 나누어진 일을 인용하고 있으나 두 가지의 설이 판이하게 서    로 어긋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넷째 전주류씨가 고려조 초에 시작된 것을 말하지 않고 감춘 것이다. 

  이와 같은 부류는 모두 진실에 근거하여 자세히 고찰할 수 있는 사실이    미비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옛날에 없었던 분관설이 지금에 와    서 있다는 것만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뿐이다.

  정조6(1783)년의 문헌비고에는“전주류씨는 본관이 문화류씨에서 분관되    었다”라고 쓰여 있다.“전주류씨는 본관이 문화류씨에서 분관되었다”: 1907년에 편찬한 증보문헌비고 정오편     에는 전주류씨가 문화류씨에서 분관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살펴보면 이 책은 정조 때 신하(臣下)에게 명하    여 지은 책이다. 이 책에 기록된 것이 비록 이와 같이 다르나 신하에게    특별한 견해가 있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 류씨의 근세에 전해 온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대로    기록된 것일 뿐이다. 보는 사람들은 이 책을 근거로 단안을 내리면 온당    치 않은 일이다.

  참판 류의(柳誼)의 가사(家史)에 인용된 문헌인 영모록[서애 류성룡이 지    은 유서]에 이르기를 류관의 아들 이름을 류방우로 적고 있는데 류방우    는 곧 고려 때 사람이고 류관은 조선 때의 우의정이었으니 앞뒤가 크게    달라 이것이 잘못 전해진 것 같고 문화류씨족보에는 예로부터 방우라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이 이르되 문화류씨의 내력은 잘 알 수가 없고 전주류씨는 처    음부터 별파라고 말했다. 

  살펴보건대 영모록은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설이 이와 같은 것으    로 보아 이미 옛 사람들도 살펴보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살펴보건대 전주류씨가 고려 초에 시작 되였고 중엽에 현달한 것이    이와 같은데 비록 그 족보의 계통을 잃어버려 자세히 고찰할 연유가 없    으니 문화류씨에서 분관되었다는 잘못된 설은 다른 증거를 대비하지 않    고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동생인 휘문이 말하기를 “전주류씨와 진주류씨가 문화류씨에서 나왔다    는 설은 대개 진주류씨가 문화류씨 집안에 장가간 사위이고 전주류씨가    또한 문화류씨의 외손사위가 되기 때문에 아울러 문화류씨 족보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이치에 맞지 않는 설을 잘못 해석하여 마침내 분    관의 의혹이 생긴 것이니 이미 진주류씨가 잘못되었고 따라서 전주류씨    도 잘못되었던 것이다.

  진주류씨는 그 그릇된 것을 곧바로 깨우쳤으나 전주류씨는 아직도 의혹    을 풀지 못하고 있으니 잘못이 심하다고 하겠다. 떠도는 말을 가볍게 믿    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와 같다.

  이는 비단 전주류씨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전국의 류씨 성을 가진    사람들 스스로가 대승공[류차달]의 후손 계행(系行)을 끌어다 붙이면서   “본래 류씨는 동성동본이며, 잘못된 것은 진주류씨족보일 뿐이다”라고들    하니 그렇다면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장인(丈人)인 류천궁(柳天弓)도    대승공[류차달] 류씨 중 하나의 류씨(柳氏)라고 하겠는가? 

                               16대손 류병문(柳炳文)이 삼가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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